삼국지에 나오는 고사성어 (가나다 順)
▶ 가도멸괵 (假途滅虢)[ 假 : 빌릴 가 / 途 : 길 도 / 滅 : 멸망할 멸 / 虢 : 나라이름 괵 밝은 눈동자와 하얀 이. 곧 아름다운 여인을 가리키는 말 진나라가 괵나라를 치기 위해 우나라에 길을 빌려줄 것을 요청한 일이 있었다. 이때 우나라의 대신 궁지기는 길을 빌려주면 우나라는 망하게 될 것이라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러나 우공은 진나라에 길을 빌려주었고 결국 괵나라와 우나라 모두 멸망하였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진군이 괵나라를 멸망시킨 뒤 급한 속도로 회군해 오니 우공이 마중을 나갔다. 우나라 도읍의 교외에 주둔하고 있던 진군은 우공이 마중나온 틈을 타서 돌연 기습을 가했다. 우공은 방심하고 있다가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포로가 되고 말았다. 결국 우나라가 이렇게 간단하게 망하니 진나라는 길을 빌려달라는 핑계로 두 나라를 삼킨 일석이조의 전과를 거둔 셈이 됐다. '가도멸괵'은 그 본래의 뜻은 작은 나라가 적의 사이에 끼여 위협을 받을때 그 틈바구니에서 강한 세력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고 기회를 노려 강한 세력을 기습하는 것을 가리킨다. 결국 '가도멸괵'이란 그 진실한 군사적인 의도를 숨기기위한 구체적인 수단으로 이용되는 계책인 셈이다. <삼국지연의> 주유가 길을 빌려 익주를 치는 척하면서 실로는 형주를 치려는 계획을 세우자, 제갈량이 이미 이를 간파하고 주유를 농락하였다. ▶ 간뇌도지 (肝腦塗地)[ 肝 : 간 간 / 腦 : 골 뇌 / 塗 : 칠할 길 도 / 地 : 땅 지 ] 간과 뇌장을 쏟아낸다는 뜻.
사지에서 아두를 구해온 조운에게 유비가 도리어 아두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이 아이 하나 때문에 명장을 잃을 뻔 했구나!'고 탄식하자 조운이 감복하여 '간과 뇌장을 쏟아내도 주공의 은공을 갚을수 없겠습니다'고 말하였다. ▶ 강노지말 (强弩之末)[ 强 : 굳셀 강 / 弩 : 쇠뇌 노 / 之 : 의 지 / 末 : 끝 말 ] 힘센 쇠뇌에서 튕겨나간 화살도 마지막에는 얇은 천 조차도 뚫지 못한다는 뜻으로, 강한 군사도 원정(遠征)을 가면 지쳐서 군력(軍力)이 약화된다는 말이다.
제갈량이 적벽전에 앞서 손권을 만나면서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이렇게 말하였는데, 여기서 강노는 조조의 병력을 뜻한다. 이 고사는 세력이 강하였던 것도 그 쇠퇴하는 시기에는 아무것도 해내지 못함을 비유한 말이다. ▶ 개문읍도 (開門揖盜)[ 開 : 열 개 / 門 : 문 문 / 揖 : 읍할 읍 / 盜 : 도적 도 ] 문을 열어 도둑이 들어오게 함. 긴박한 주위 사정을 깨닫지 못하고 감상(感傷)이나 비탄에 빠져 제스스로 화(禍)를 불러들임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개문납도(開門納盜)·개문납적(開門納賊)이라고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손권전(四七孫權傳)〉편에, 후한(後漢) 말 오(吳)나라의 무장(武將) 손책(孫策)의 세력이 날이 갈수록 강해지자 당거의 태수(太守; 중국 고대의 지방장관) 허공(許貢)이 천자 헌제(獻帝)에게 손책을 제거해야 한다는 상서를 올렸다. 그러나 이 상서문이 중도에 손책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크게 노한 손책은 무력으로 허공을 죽여버렸다. 그 때 허공의 집에 있던 세 명의 식객(食客)은 손책의 무력에서 간신히 탈출하였다. 이들은 허공의 원수를 갚기 위해 손책이 사냥을 즐겨하는 것을 알고 이를 노려 손책을 덮쳤다. 이때 손책은 깊은 상처를 입고 간신히 도망쳤으나 그 후 상처가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동생인 손권에게 뒷일을 맡기고 죽었다. 그러나 손권이 형의 죽음을 슬퍼하여 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어 손책의 가신(家臣)인 장소(張?)가 손권에게 말하기를, “이런 위급한 상황 속에서 하염없이 슬픔에 잠겨 있으면 이것은 마치 스스로 문을 열어놓고 도적을 맞이하는 개문읍도격입니다. 난세에는 욕심이 많은 늑대가 득실거리는 법입니다. 정신차리십시오!”라고 충고하였다. 손권은 이 충고의 참뜻을 깨달아 그 즉시 상복을 벗어던지고 군대를 순시하러 나섰고, 아버지 손견(孫堅)의 원수 황조(黃祖)를 무찌르고 적벽(赤壁)에서는 유비(劉備)와 연합하여 조조(曹操)의 군대를 격파하여 강남(江南)에서 그의 지위를 굳혔으며, 조조의 아들 조비(曹丕)가 후한(後漢)의 헌제(獻帝)를 협박하여 제위(帝位)를 빼앗아 국호를 위(魏)라 하고 황제를 칭하자, 손권도 제위에 올라 오(吳)·위·촉한(蜀漢)의 삼국시대(三國時代)를 열게 된 주역으로서 역사와 한 시대를 풍미하였음은 물론이다. 영명(英明)한 군주와 이를 받드는 충신의 호흡이 일치하여 부국강병의 국가경영에 성공한 역사적 사례를 본 것이다. 조선시대 말에 간신(奸臣)들이 군왕의 얼을 뺏고 닥달하여 국권을 도둑맞게 한 개문읍도의 꼴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 거재두량 (車載斗量)[ 車 : 수레 거 / 載 : 실은 재 / 斗 : 말 두 / 量 : 잴 량 ] 수레에 싣고서 말[斗]로 잰다는 뜻으로, 아주 흔하거나 쓸모 없는 것이 많음을 비유하는 말. 《삼국지(三國志)》 〈오서(吳書)〉 '오주손권전(吳主孫權傳)'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219년 오나라의 손권이 위(魏)나라의 조조(曹操)와 결탁하여 촉한(蜀漢)의 용장 관우(關羽)를 죽였다. 221년 촉한이 오나라를 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오나라의 손권은 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위나라의 사자로 중대부(中大夫) 조자(趙咨)가 뽑혔다. 조자에게 손권이 말하였다. "결코 오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키지 마시오." 조자가 위나라의 수도에 도착하자, 위왕 조비(曹丕)는 그가 찾아온 이유를 알면서도 짐짓 속내를 떠보았다. "오나라의 군주는 어떤 사람인가?" "총명하고 자애롭습니다. 또한 재능이 뛰어나고 원대한 지략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과장이 심하군." 조비가 비꼬듯 웃었다. 그러자 조자가 하나하나 실례를 들어가며 반론하였다. 조비가 또 물어보았다. "만일 위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한다면?" "대국에 무력이 있다면, 소국은 방위책이 있습니다." "위나라가 두려운가?" "오나라에는 100만의 용맹한 군사와 함께 지리적인 천험(天險)이 있습니다." "그대 같은 인재가 오나라에는 얼마쯤 되나?" "나 같은 자는 수레에 싣고 말로 잴 정도[車載斗量]입니다." 조비가 탄복하여 말하였다. "사신으로서 군주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함은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오." 배석한 위나라의 신하들도 감동하였다. 조자의 활약으로 오나라와 위나라의 군사 동맹이 성립되었다. 조자가 돌아오자, 손권은 상(賞)과 함께 기도위(騎都尉) 벼슬을 내렸다. ▶ 계륵 (鷄肋)[ 鷄 : 닭 계 / 肋 : 갈비 륵 ] 닭의 갈비뼈는 먹을 것은 없으나 그래도 버리기는 아깝다는 뜻에서, 무엇을 취해 보아도 이렇다 할 이익은 없지만 버리기는 아까움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말은 《후한서(後漢書)》 〈양수전(楊修傳)〉에 나오는 말로, 위(魏)나라 조조(曹操)와 촉(蜀)나라 유비(劉備)가 한중(漢中) 땅을 놓고 싸울 때, 조조는 진격이냐 후퇴냐 결정을 내릴 수 없는 곤경에 빠져 있었다. 부하 한 사람이 내일의 일을 묻고자 밤늦게 조조를 찾아가니 조조가 다만 계륵(鷄肋)이라고만 할 뿐 아무 말이 없었다. 부하는 그대로 돌아와 계륵이 무슨 뜻이냐고 막료들과 의논을 하는데 아무도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가운데 단지 주부(主簿)로 있는 양수(楊修)만이 조조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내일은 철수명령이 내릴 테니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해석은 "닭의 갈비는 먹음직한 살은 없지만 그대로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다. 결국 이곳을 버리기는 아깝지만 대단한 땅은 아니라는 뜻이니 버리고 돌아갈 결정이 내릴 것이다(夫鷄肋 食之則無所得 棄之則如可惜 公歸計決矣)"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적중하여 다음날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 괄목상대 (刮目相對)[ 刮 : 비빌 괄 / 目 : 눈 목 / 相 : 서로 상 / 對 : 대할 대 ] 이 말은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에 나오는 고사에서 유래된 것으로,
중국 삼국시대에 오(吳)나라의 왕 손권(孫權)이 그의 장수 여몽(呂夢)이 무술에는 능하나 학문을 너무 소홀히 하는 것을 나무라자 여몽은 이로부터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 후에 노숙(魯肅)이 찾아가 전과 달라진 그의 높은 식견에 놀라워하자 여몽은 "선비가 사흘을 떨어져 있다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대하여야 합니다(士別三日 卽當刮目相對)"라고 하였다. ▶ 국궁진췌 (鞠窮盡膵)[ 鞠 : 국문할 국 / 躬 : 몸 궁 / 盡 : 다할 진 / ? : 병들 췌 ] 凡事如是 難可逆見 臣鞠躬盡?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 범사여시 난가역견 신국궁진췌 사이후이 지어성패이둔 비신지명소능역도야 모든 일이 이와 같이 미리 헤아려 살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입니다. 일을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미리 내다보는데 밝지 못합니다. 유명한 공명선생의 후출사표(後出師表)의 마지막 구절에서 촉한을 위해 국궁진췌(鞠躬盡?)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국궁은 존경하는 마음으로 몸을 굽힌다는 뜻이며, 진췌는 몸이 부서지도록 노력한다는 뜻이다. 결국 국궁진췌는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는 뜻으로, 선주의 유언에 따라 어리석지만 황제인 유선을 향한 그의 변함 없는 충절을 나타내고 있다. 즉, 마음과 몸을 다하여 나라 일에 이바지한다는 뜻. ▶ 낙불사촉 (樂不思蜀)[ 樂:즐길 락 / 不:아닐 불 / 思:생각할 사 / 蜀:나라이름 촉 ] 즐기느라 촉의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뜻.
암우한 후주 유선이 촉 멸망 후 사마소를 뵙는 자리에서 '너무 즐거워서 촉의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라고 하자, 그를 크게 비웃었다고 한다. ▶ 난공불락 (難攻不落)[ 難 : 어려울 난 / 攻 : 칠 공 / 不 : 아닐 불 / 落 : 떨어질 락 ] 학소가 지키는 진창성이 쉽사리 빼앗기지 않자, 제갈량이 감탄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 난형난제 (難兄難弟)[ 難 : 어려울 난 / 兄 : 맏 형 / 難 : 어려울 난 / 弟 : 아우 제 ] 형제의 우열을 가릴수 없다는 뜻으로 나중에 바뀌어 상하우열을 가릴수 없는 것을 지칭하게 되었다.
이 말을 후학들이 평가하기로 부모된 사람은 죽을때까지 자기 자식의 우열을 가려 품평을 해서는 안 된다고 했는가 하면 부모로부터 '형보다 못하다'는 말을 들은 아우도 기분이 좋을리 없는데 만일 동생보다 못한 형이라고 평가한다면 어떤 정신적 고통을 받게 될까를 염두에 두라는 뜻으로 풀이했다. ▶ 내조지현 (內助之賢)[ 內 : 안 내 / 助 : 도울 조 / 之 : 의 지 / 賢 : 착할 현 ] 현명한 아내의 내조. 내조(內助)란 내부에서 하는 원조라는 뜻으로, 아내가 집안일을 잘 다스려 남편을 돕는다라는 말로 쓰이고 있으며, 내조지공(內助之功)이라고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위(魏)나라 문제(文帝) 조비(曹丕)의 황후(皇后)인 곽씨(郭氏)는 군(郡)의 장관인 곽영(郭永)의 딸이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남달리 똑똑하였으며 곽영이 “내 딸은 여자 중의 왕이다”라 말하여 ‘여왕’이라 불렀다고 한다. 조조(曹操)가 위나라 왕이 되고 나서 후계자로 장자(長子)인 조비를 정할 것인가, 똑똑하고 문장이 뛰어난 조식(曹植)으로 정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나이와 장자라는 명분으로 조비를 황태자로 정하였다. 그러나 뒤에 조비의 황후 곽씨가 책략(策略)을 썼다는 설도 있다. 조비가 즉위하자 조예(曹叡:3대 명제(明帝))를 낳은 견후(甄后)를 참소(讒訴)하여 죽였는데, 머리로 얼굴을 덮고 겨로 입을 틀어막은 채로 매장하였다고 한다. 이후 곽씨를 황후로 삼으려고 하자 중랑(中郞:궁중 宿衛의 감독관)인 잔잠(棧潛)이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상소하였다. “옛날 제왕은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在昔帝王之治天下(재석제왕지치천하)] 밖에서 돕지 않으면 안에서 돕는 것이 있었다[不惟外輔 亦有內助(불유외보 역유내조)]. 다스려지고 어지러움이 이로 말미암고 성하고 쇠하고 이로 쫓아 된다[治亂所由 盛衰終之(치란소유 성쇠종지)]. (《위지(魏志)》<문덕돈후전(文德敦后傳)>) 이어서 경계해야 할 전례(典例)로 《주역(周易)》이나《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기록된 내용을 인용하면서, 견후 살해의 경위 등으로 보아 내조의 공을 세울 수 없는 위인(爲人)으로 보고서 신분이 천한 사람을 귀한 자라에 앉히는 위험을 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 말을 듣지 않고 곽씨를 황후로 삼았으며, 여기서 ‘내조지공’이라는 말이 유래되었다. 남편의 사회생활이나 출세에 미치는 아내의 도움을 내조의 공이라고 말하는데, 여성의 사회 진출이 많아지면서 외조지공(外助之功)이라는 말도 요즘에는 자주 쓰인다. ▶ 노우지독 (老牛지砥犢)[ 老 : 늙은이 로 / 牛 : 소 우 / 砥 : 핥을 지 / 犢 : 송아지 독 ] 늙은 소가 어린 송아지를 핥는다는 뜻으로, 양표가 아들 양수의 죽음 후에 매우 슬퍼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조조는 이러한 양표를 보고는 양수를 죽인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춘추전국시대 위나라의 조조 휘하에 주부(主簿)라는 벼슬을 가진 양수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고 지혜로웠는지 조조마저 내심 불안해 할 정도로 전략에 탁월한 사람이었다. 양수가 없이는 어떠한 전략도 세울 수 없을 정도로 꼭 필요한 인물이었지만 그럴수록 조조는 양수를 견제하면서 경계심을 풀 수 없는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조조가 촉한의 유비와 한중(漢中)을 놓고 치열한 전투를 할 때 전세가 불리한 것을 감지한 조조는 전면전을 벌일 것인가, 철군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조조는 막료들에게 계륵(鷄肋)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막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모르고 있었지만 양수만이 그 명령을 듣고 갑자기 짐을 싸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막료들이 양수에게 그 연유를 묻자 양수가 “계륵이란 본래 먹을것이 없어서 먹기는 뭐하지만 그렇다고 버리자니 아까운 음식이오. 주공께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아마 지금 이 한중성(漢中城)이 그리 쓸모있는 땅이 아니니 퇴각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해서 그런 것 같소이다.”라고 말했다. 양수의 해석은 “닭의 갈비는 먹음직한 살은 없지만 그래도 버리기는 아까운 것이다. 결국 이곳을 버리기는 아깝지만 대단한 땅이 아니라는 뜻이니 버리고 돌아갈 결정이 내릴 것이다.” 라는 것이다. 결국 양수의 생각이 적중해서 다음날 철수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조조는 이 일로 자신의 의중을 꿰뚤어 본 양수의 총명함에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철수 명령을 내리기 전에 군사들의 마음을 교란시켰다는 구실을 내세워 양수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만다. 만약 조조가 양수라는 최고의 지략가를 끝까지 신임했더라면 유비는 결코 조조를 이기지 못했을 것이다. 양수가 참수 당한 후 조조는 양수의 아버지 양포를 만나게 되는데 모습이 예전만 못한 것 같아 “왜 그리 모습이 파리하고 해쓱하냐?”고 묻는다. 그때 양포는 “선견지명이 없어 자식을 잘 가르치지 못해 죄를 짓게 했습니다. 아들이 죽고나니 마치 늙은 어미소가 어린 송아지를 핥아주는 마음처럼 어버이로서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해쓱해졌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성어가 노우지독인데 어미소가 송아지를 핥아주는 사랑으로 부모가 자녀를 아끼고 깊이 사랑하는 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 단기천리 (單騎千里)[ 單 : 홑 단 / 騎 : 말탈 기 / 千 : 일천 천 / 里 : 마을 리 ] 조조를 떠나 유비를 찾아가는 관우의 모습을 묘사한 고사. 말 하나를 타고 천리를 내달린다는 뜻. ▶ 단도부회 (單刀赴會)[ 單 : 홑 단 / 刀 : 칼 도 / 赴 : 나아갈 부 / 會: 모일 회 ] 칼 한자루를 들고 모임에 나간다는 뜻으로, 여기서 모임이란 위험한 자리를 뜻한다.
관우를 초청하여 죽이겠다는 노숙의 궁벽한 꾀에 대해 관우는 청룡도 한자루만 들고 찾아가는 대담함을 보여주었다. ▶ 도리상영 (倒履相迎)[ 倒 : 거꾸로 도 / 履 : 신 리 / 相 : 서로 상 / 迎 : 맞을 영 ] 신을 거꾸로 신고 손님을 맞이하는 것을 말한다.
왕찬에 대한 설명 중, 그의 스승 격인 채옹이 왕찬의 방문에 신마저 거꾸로 신고 나가서 환영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 도원결의 (桃園結義)[ 桃 : 복숭아 도 / 園 : 동산 원 / 結 : 맺을 결 / 義 : 옳을 의 ]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은 데에서 비롯된 말로, 뜻이 맞는 사람끼리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약속한다는 뜻이다. 유비(劉備), 관우(關羽), 장비(張飛)가 도원(桃園)에서 의형제를 맺었다는 이야기에서 비롯된 말로, 뜻이 맞은 사람끼리 하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행동을 같이 할 것을 약속한다는 뜻이다. 중국 원(元)과 명(明)의 교체기 때의 사람인 나관중(羅貫中, 1330?~1400)이 지은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비롯되었다. 《삼국지연의》는 진수(陳壽, 233~297)의 《삼국지(三國志)》에 서술된 위(魏)·촉(蜀)·오(吳) 3국의 역사를 바탕으로 전승되어 온 이야기들을 나관중이 이야기체의 장편 소설로 재구성한 것이다. 그는 후한(後漢) 황실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유비를 중심으로 삼국의 분립(分立)과 대립의 역사를 서술하였는데, 그래서 유비가 관우, 장비와 함께 도원(桃園)에서 결의(結義)하여 의형제(義兄弟)를 맺은 내용으로 이야기의 첫머리로 삼고 있다. 이는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나타나지 않은 사실로 이야기의 전승 과정에서 허구(虛構)로 재구성된 것이다. 나관중이 도원결의(桃園結義)를 이야기의 첫머리로 삼은 것은 국가와 민족의 정통(正統) 회복이라는 대의(大義)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에는 청(淸) 초기에 모종강(毛宗崗)이 다듬은 ‘모본(毛本)’이 《삼국지연의》의 정본(定本)으로 여겨지는데, 이를 기초로 도원결의(桃園結義)와 관련된 이야기를 간추려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후한(後漢) 말 환관의 발호로 정치가 어지럽자 천하 인심이 날로 흉흉해지고 사방에서 도적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장각(張角)이 남화노선(南華老仙)에게 세 권의 천서를 얻어 사람들의 병을 고쳐주면서 스스로를 대현량사(大賢良師)라 했다. 장각이 두 동생과 함께 난을 일으키니 사방의 백성들이 모두 누런 헝겊으로 머리를 싸매고 장각을 따라서 일어났다. 장각의 군대가 유주(幽州) 땅까지 범해 들어오자 유주(幽州) 태수(太守) 유언(劉焉)은 교위(校尉) 추정(雛靖)의 말을 들어 의병을 모집하는 방문(榜文)을 내 걸었다. 이 방문이 탁현(?縣)으로 들어가 마침내 그 고을의 한 영웅을 끌어내게 되었다. 한(漢) 경제(景帝)의 후손인 유비(劉備)는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지성으로 섬겼는데 집이 가난해서 미투리를 삼고 자리를 치는 것으로 생계를 삼았다. 유언이 방(枋)을 내어 군사를 모집할 때 유비의 나이는 이미 스물여덟이었다. 이 날 유비가 방문(榜文)을 보고 탄식을 하고 있는데 장비(張飛)가 나타나 대장부가 나라를 위해서 힘을 내려고 하지 않고 어째서 한숨만 쉬고 있느냐고 꾸짖었다. 유비가 도적을 무찔러 백성을 편안히 할 생각은 간절하나 힘이 없어서 장탄식을 한다고 하자, 장비는 자신의 재산을 팔아 고을 안의 용사들을 모아 함께 큰 일을 하자고 했다. 유비가 크게 기뻐하며 장비와 함께 마을 주막에 가서 술을 마시고 있는데, 관우가 주막으로 들어와 군사 모집에 응해 성으로 들어가는 길이라며 술을 독촉했다. 유비가 자리로 불러 마음에 있는 바를 이야기했더니 관우도 크게 기뻐했고, 세 사람은 함께 장비의 집으로 갔다. 큰 일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장비가 집 뒤의 복숭아 동산에 꽃이 한창이니 내일 이 동산에서 천지(天地)에 제(祭)를 지내고 셋이 의형제를 맺어 한마음으로 협력하기로 한 뒤에 일을 도모하자고 하였다. 유비와 관우가 동의하여 다음날 도원(桃園)에 검은 소(黑牛)와 흰 말(白馬)과 지전(紙錢) 등 제물을 차려 놓고 제를 지내며 맹세했다. “유비, 관우, 장비가 비록 성은 다르오나 이미 의를 맺어 형제가 되었으니, 마음과 힘을 합해 곤란한 사람들을 도와 위로는 나라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백성을 편안케 하려 하고, 한 해 한 달 한 날에 태어나지 못했어도 한 해 한 달 한 날에 죽기를 원하니, 하늘과 땅의 신령(皇天后土)께서는 굽어 살펴 의리를 저버리고 은혜를 잊는 자가 있다면 하늘과 사람이 함께 죽이소서” 맹세를 마치고 유비가 형이 되고, 관우가 둘째, 장비가 셋째가 되었다. 제(祭)를 마치고 소를 잡고 술을 내어 고을 안의 용사들을 불러모으니 300명이었다. 이 날 도원(桃園)에서 다들 취하도록 술을 마시며 함께 즐겼다. 유비, 관우, 장비가 도원(桃園)에서 결의(決議)를 한 이 이야기에서 도원결의(桃園結義)는 의형제(義兄弟)를 맺거나 뜻이 맞는 사람들이 사욕을 버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합심할 것을 결의하는 일을 나타내는 말로 널리 쓰이게 되었다. 그리고 실제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전승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삼국지연의》의 영향 때문에 제문(祭文)의 내용이 중국인들 사이에서 서약(誓約)의 모범으로 널리 쓰이기도 했다. ▶ 돈견 (豚犬)[ 豚 : 돼지 돈 / 犬 : 개 견 ] 돼지와 개라는 말로, 어리석고 불초한 자식을 가리키는 말. 송(宋)나라 말 원(元)나라 초에 증선지(曾先之)가 편찬한 사서《18사략(十八史略)》 동한(東漢) 효헌제(孝獻帝) 조에 나오는 말이다. 관도(官渡)의 싸움에서 원소군을 물리치고 기반을 확립한 조조는 이어 형주를 공략하고 유비를 하구라는 곳으로 몰아 넣은 후 백만 대군을 동원하여 강동의 오(吳)나라로 진격해 왔다. 이때 오나라에는 손견(孫堅)이 죽고 그 아들 손권(孫權)이 즉위하여 주유(周瑜)·여몽(呂蒙)·노숙(魯肅) 등 막강한 참모의 보좌를 받고 있었다. 조조의 대군이 밀려 온다는 소식을 들은 손권은 유비군과 연합하여 이를 대적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양군은 장강을 사이에 두고 포진하였다. 조조는 수전에 약한 군사를 보호하기 위해 전함의 고물과 이물을 연결시켜 선단을 하나로 묶었다. 오군 사령관 주유는 이를 보고 곧 화공(火攻)을 준비하였다. 먼저 노장 황개(黃蓋)를 사소한 트집을 잡아 군사들 앞에서 욕보이는 고육계(苦肉計)로 조조를 속이고, 황개는 조조에게 거짓 항복을 하였다. 그리고는 겨울철에 보이는 강남 특유의 계절풍을 기다렸다. 하나로 묶인 선단은 불에 약할 수밖에 없고, 화공을 하려면 바람의 방향이 맞아야 하기 때문이다. 마침내 동남풍이 불기 시작하자, 황개가 마른 풀과 염초를 가득 실은 작은 배를 이끌고 백기를 휘날리며 조조군으로 향하였다. 조조군에서는 뜻밖의 동남풍에 당황하면서도 황개의 투항을 기뻐하였다. 황개가 조조군에 다가가 화공을 시작한 후에야 모든 것을 눈치 챈 조조군은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불은 바람을 타고 곧 조조군의 선단에 옮겨 붙었다. 가뜩이나 물에 약한 조조 군사들은 우왕좌왕하다가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이때 주유의 본군이 물밀듯이 밀어닥치자 조조군은 대적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궤멸하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적벽(赤壁) 대전이다. 적벽 대전으로 자존심을 크게 상한 조조는 틈만 나면 오나라의 손권을 공략하려 했지만 번번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자 조조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들을 낳으면 응당 손중모(孫仲謀:중모는 손권의 자) 같아야 한다. 지난 날 항복한 유경승(劉景升:劉表)의 아들(劉琮)은 돼지 자식, 개 자식에 불과하다.” 돈견이란 이와 같이 어리석고 못난 자식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인데, 부모가 남 앞에서 자기 자식을 겸손하게 부르는 말로도 쓰인다. ▶ 득롱망촉 (得?望蜀)[ 得 : 얻을 득 / ? : 땅이름 롱 / 望 : 바랄 망 / 蜀 : 나라이름 촉 ] 농서 지방을 얻고나니 촉 지방이 탐난다는 말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음을 가리키는 말. 《후한서(後漢書)》 광무기(光武紀)에서 비롯된 말이다. 후한 광무제(光武帝)가 뤄양(洛陽)을 도읍으로 한을 재건했을 무렵의 일이다. 전한 말 중국은 장안을 점거한 적미적(赤眉賊)의 유분자(劉盆子)를 비롯하여, 간쑤성 농서의 외효(??), 쓰촨 촉의 공손술(公孫述), 허난 수양(?陽)의 유영(劉永), 안후이 노강(盧江)의 이헌(李憲), 산둥 임치(臨淄)의 장보(張步) 등이 할거하고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은 스스로 황제라고 일컬을 정도로 세력이 컸다. 한을 재건한 광무제는 이들을 하나씩 모두 토벌하고 농서와 촉만 아직 복속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 중 세력이 약한 외효는 광무제와 공손술 간에 양다리 외교로 명맥을 유지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외효가 죽자 그 아들이 광무제에게 항복함으로써 마침내 농서도 후한의 손에 들어왔다. 이때 광무제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득롱망촉이라는 말이 비롯되었다. “두 성이 함락되거든 곧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촉나라 오랑캐를 쳐라. 사람은 만족할 줄 몰라 이미 농서를 평정했는데 다시 촉을 바라게 되는구나. 매양 군사를 출동시킬 때마다 그로 인해 머리가 희어진다(兩城若下 便可將兵南擊蜀虜 人固不知足 旣平?復望蜀 每一發兵 頭髮爲白).” 《후한서》 헌제기(憲帝紀)에도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촉(蜀)을 차지한 유비(劉備)가 오(吳)의 손권(孫權)과 다투고 있는 틈을 노려 위(魏)의 조조(曺操)는 단숨에 한중(漢中)을 점령하고 농을 손에 넣었다. 그러자 명장 사마 의(司馬懿)가 조조에게 말하였다. “이 기회에 촉의 유비를 치면 쉽게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조조는 이렇게 말하면서 진격을 멈추었다. “사람이란 만족을 모른다고 하지만, 이미 농을 얻었으니 촉까지는 바라지 않소.” 실은 당시의 조조군으로 촉을 토벌하기에는 힘이 부쳤던 것이다. 이와 같이 득롱망촉이란 하나를 이루면 그 다음이 욕심난다는 뜻으로,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의 속성을 드러내는 말이다. 평롱망촉(平?望蜀)이라고도 한다. ▶ 만전지책 (萬全之策)[ 萬 : 일만 만 / 全 : 온전할 전 / 之 : 어조사 지 / 策 : 꾀 책 ] 만전을 기하는 계책이란 말로, 조금도 허술함이 없는 아주 완전한 계책이라는 뜻. 만전(萬全)이란 가장 안전함을 가리키는 말로 《사기(史記)》《한비자(韓非子)》 등 중국 고전 여러 곳에서 두루 쓰이고 있다. 《후한서(後漢書)》 유표전(劉表傳)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위(魏)의 조조(曺操)가 북방의 원소(袁紹)와 싸운 관도(官渡)의 싸움은 조조가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한판 승부로 평가된다. 당시 조조의 군대는 3만 명이었으나 원소의 군대는 10만 명이나 되었다. 조조는 한때 원소의 명장 안량(顔良)과 문추(文醜)를 죽이는 등 원소군에게 일격을 가했으나 수적 열세로 수세에 몰려 도읍인 허창으로 후퇴할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군을 거느린 원소도 초기에 예봉이 꺾여 섣불리 공격하지 못하고 싸움은 소강 상태로 들어갔다. 이를 타개할 목적으로 원소는 유표에게 원조를 구하였다. 유표(劉表)는 당시 형주(荊州)에서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는 원소를 돕겠다고 하였지만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어느 한쪽을 도우려 하지 않고 싸움을 관망만 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보다못한 한숭(韓嵩)과 유선(劉先)이 다음과 같이 유표를 설득하였다. “조조는 반드시 원소군을 격파하고, 그 다음엔 우리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관망만 하고 있으면 양쪽의 원한을 사게 됩니다. 그러므로 강력한 조조를 따르는 것이 현명한 만전지책이 될 것입니다(曺操必破袁紹 後來攻吾等矣 吾等留觀望 將受怨於兩便 故隨强操 賢且爲萬全之策矣).” 그러나 의심이 많은 유표는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다가 뒤에 큰 화를 당하게 되었다. 여기서 만전지책이란 적절한 선택, 적절한 시간, 적절한 방법 등이 함께 갖추어진, 조금의 실수도 없는 가장 안전한 계책을 가리킨다. ▶ 망매해갈 (望梅解渴) / 망매지갈 (望梅止渴)[ 望 : 바랄 망 / 梅 : 매화나무 매 / 解 : 풀 해 / 止 : 그칠 지 / 渴 : 목마를 갈 ] 매실을 바라보며 갈증을 해소한다는 뜻으로, 공상으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는 말.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유비(劉備)가 조조(曺操)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을 때, 하루는 조조가 유비를 불러 자리를 함께 하고는 손을 잡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조금 전 후원의 매실이 익은 것을 보고 장수(張繡)를 정벌할 때의 기억이 나서 그대와 함께 담소하며 술이나 마시자고 불렀소. 그때는 행군 도중 물이 떨어져 병사들의 고통이 아주 심했는데, 내게 문득 한 가지 묘안이 떠올랐다오. 그래서 말채찍으로 앞을 가리키며 병사들에게 이렇게 말했소. “저 앞에는 넓은 매실나무 숲이 있는데, 그 매실은 아주 시고도 달아 우리 목을 축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잠시만 참고 힘을 내자.” 이 말을 들은 병사들은 매실의 신맛을 생각하고 입 안에 침이 돌아 갈증을 잊게 되었소. 그리고 오래지 않아 물 있는 곳을 찾아 다행히 갈증과 피로를 해소시켰다오. 조조는 망매지갈을 이룰 수 없는 것을 환상으로 대신한다는 뜻으로 사용하여 이로써 유비의 마음을 떠보려던 것이다. 육조 시대 송(宋)의 유의경(劉義慶)이 지은 《세설신어(世說新語)》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진(晉)을 세운 사마 염(司馬炎)이 오(吳)나라를 공격할 때의 일이다. 길을 잘못들어 이리저리 헤매는 동안 병사들의 식수가 바닥이 났고, 주위를 둘러보아도 물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병사들은 갈증이 심하여 더이상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난국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고민을 하던 사마 염은 문득 꾀를 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여러분 힘을 냅시다. 조금만 참고 가면 저 언덕 넘어에 매화나무 숲이 있소. 그 곳에 가면 탐스러운 매실이 가지가 휠 정도로 매달려 있소. 그 매실이 우리 갈증을 없애 줄 것이오.” 매실이란 말을 들은 병사들은 갑자기 입안에 침이 고여 갈증을 잊었다. 그리하여 다시 진격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하게 되었다. 이 경우는 거짓 사실로써 실제의 욕망을 충족시킨다는 의미이다. 매림지갈(梅林止渴), 망매해갈(望梅解渴)과 같은 말이다. ▶ 망천지시 (亡天之時) 하늘이 망하려는 것.
17로 제후군이 모여서 원소를 장으로 추대하자, 원소가 동탁의 만상을 이말로 표현하였다. ▶ 명모호치 (明眸皓齒) / 폐월수화 (閉月羞花) 미인을 두고 '침어낙안(沈魚落雁)'이나 '폐월수화(閉月羞花)' 또는 '명모호치(明眸皓齒)'라는 말이 시나 부 등에서 자주 사용된다.
출처를 보면 조조의 삼남 조식이 견씨를 좋아했는데 그녀는 형인 조비에게 시집가 견후가 되었다. 그녀는 얼마후 곽씨에게 황후의 자리를 빼앗기고 죽음을 당했고 조식은 그녀의 유품인 베개를 형 위제 조비로부터 받아 임지로 돌아오는 길에 낙수가에 이르렀다. 그때 조식은 견씨의 모습을 회상하며 '낙신부(洛神賦)'를 지었는데 조식은 매우 비감한 심정이 되어 다음과 같이 읊었다. '엷은 구름에 사인 달처럼 아련하고 흐르는 바람에 눈이 날리듯 가뿐하다.' '폐월(閉月)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낙신부'에서 '폐월'의 명구를 낳은 부분에 이어 그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어깨선은 깎은 듯 매끄럽고 허리에는 흰 비단을 두른것 같다. 목덜미는 길고 갸름하며 흰 살결을 드러내고 있다. 향기로운 연지를 바르지도 않고 분도 바르지 않았다. 구름같은 모양으로 머리는 높직하고 길게 그린 눈썹은 가늘게 흐른다. 빨간 입술은 선연하게 눈길을 끌고 하얀 이는 입술 사이에서 빛난다. 초롱한 눈은 때로 곁눈질 치고 보조개는 귀엽기 그지없도다.' 여기서 명모(明眸)란 시원스럽고 맑은것, 호치(皓齒)는 하얗고 아름다운 이를 말한다. '명모호치'는 미인의 조건이 되었다. 나중 시인들은 이 말을 빌어 미인을 뜻할때 명모호치 또는 폐월수화라고 노래했다.
당(唐)나라 말기의 대시인으로 시성이라고도 불린 두보(杜甫)의 시 애강두(哀江頭)에 나오는 말이다. 당나라는 현종 말년에 현종이 양귀비(楊貴妃)에 빠져 국사를 돌보지 않는 바람에 총신 양국충(楊國忠)이 정권을 농단하며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다. 이 틈을 타고 하동(河東)·범양(范陽) 절도사를 겸하던 안녹산(安祿山)이 양국충 타도를 외치며 난을 일으켜 수도 뤄양을 함락하고 대연(大燕)황제로 즉위하였다. 두보는 젊었을 때부터 각지를 떠돌며 이백(李白)·고적(高適) 등의 시인들과 교유해 관직에는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 박면피 (剝面皮) 오제 손호가 자기 기분에 들지않는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기는 만행을 저지른 데서 이 고사가 비롯되었는데,
이는 '면피를 벗긴다'는 것은 파렴치한 자의 면모를 밝혀 수치를 맛보게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른바 낮가죽이 두껍다라든가 뻔뻔스럽다라든가 염치를 모른다는 것을 '후안무치'라고 하는데 이것은 '시경' 소아의 <교언>의 한편에 '교언여황(巧言如簧)은 안지후의(顔之厚矣)' 에서 나온 고어로 이것을 좀 새롭게 구성한 것이 '남사(南史)' 변변전에 나오는 '면피후(面皮厚)' 즉 뻔뻔스러운 사람을 두고 얼굴 가죽이 두껍다고 말했다. ▶ 백리지재 (百里之才) 재능이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 말.
노숙이 방통을 유비에게 추천하면서 방통을 이에 비유하였다. 참고) 그러나 연의에서는 이 구절을 '방통은 백리를 다스릴 인물이 아니다'라고 풀이해 놓았다. ▶ 백미 (白眉) 백미는 흰 눈썹이란 뜻이다.
제갈량, 즉 제갈공명(諸葛孔明)과도 친교를 맺었던 마량(馬良)은 형제가 다섯이었다. 다섯 형제는 모두 자(字)에 상(常)이란 글자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들 형제를 가리켜 ‘마씨오상(馬氏五常)’이라 일컬었다.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났으나 그 중에서도 마량이 가장 뛰어났으므로 그 고장사람들은 말하기를 “마씨오상은 모두 뛰어나지만 그 중에서도 흰 눈썹이 가장 훌륭하다(馬氏五常 白眉最良)”라고 하였다. 즉, 마량은 어려서부터 눈썹에 흰 털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렸던 것이다. 이 때부터 같은 또래, 같은 계통의 많은 사람 중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을 백미라 부르게 되었고, 지금은 사람만이 아니라 뛰어난 작품을 이야기할 때도 백미라 부른다.《삼국지》 <촉지 마량전(蜀志馬良傳)>에 그 유래가 전한다. ▶ 복소지란 (復巢之卵) 공융의 두 아들이 한 말.
둥지가 부서지면 알이 성할리가 없다는 뜻. 공융이 조조의 노여움을 사 끌려가자, 그의 비복들이 그 두 자제에게 몸을 피하라고 권했지만, 둘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이렇게 말하였다. 유) 복소지하 안유완란 (復巢之下 安有完卵), 소훼란파(巢毁卵破) ▶ 비육지탄 (悲肉之歎) 보람있는 일을 하지 못하고 헛되이 세월만 보내는 것을 한탄함을 비유한 말.
원래, 할 일이 없어 가만히 놀고 먹기 때문에 넓적다리에 살만 찜을 한탄한다는 뜻이다. 중국 삼국시대 유비(劉備)가 한 말이다. 유비는 한때 신야(新野)라는 작은 성에서 4년간 할 일 없이 지냈는데, 어느 날 유표의 초대를 받아 연희에 참석하였을 때 우연히 변소에 갔다가 자기 넓적다리에 유난히 살이 찐 것을 보게 되었다. 순간 그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그 눈물 자국을 본 유표가 연유를 캐묻자 유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나는 언제나 몸이 말안장을 떠나지 않아 넓적다리에 살이 붙을 겨를이 없었는데 요즈음은 말을 타는 일이 없어 넓적다리에 다시 살이 붙었습니다. 세월은 사정없이 달려서 머지않아 늙음이 닥쳐올 텐데 아무런 공업(功業)도 이룬 것이 없어 그것을 슬퍼하였던 것입니다(吾常軍不離鞍 ?肉皆消 今不復騎 ?裏肉生 日月若馳 老將至矣 而功業不建 是以悲耳)." 비육지탄은 여기에서 비롯된 말이다. ▶ 사이후이 (死而後已)[ 死 : 죽을 사 / 而 : 어조사 이 / 後 : 나중 후 / 已 : 이미 이 ] 凡事如是 難可逆見 臣鞠躬盡? 死而後已. 至於成敗利鈍 非臣之明所能逆覩也. 범사여시 난가역견 신국궁진췌 사이후이 지어성패이둔 비신지명소능역도야 모든 일이 이와 같이 미리 헤아려 살피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신은 다만 엎드려 몸을 돌보지 않고 죽을 때까지 애쓸 뿐입니다. 일을 이루고 못 이룸, 이롭고 해로움에 대해서는 미리 내다보는데 밝지 못합니다. 《삼국지(三國志)》에 나오는 말이다. 제갈 량이 위(魏)나라를 공격하기 전에 한 말에서 유래한다. 제갈 량은 촉한(蜀漢)의 소열제(昭烈帝) 유비(劉備)의 삼고초려(三顧焦廬)에 감명을 받고 그의 천하 경략을 돕기 위해 온 힘을 쏟기로 결심하였다. 이런 결심은 유비가 죽고 그의 아들 유선(劉禪)에게도 마찬가지로 충의를 다하였다. 출사표 후편에서 제갈 량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漢)나라의 위업은 익주(益州) 같은 변경에 안주할 수가 없습니다. 반드시 위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통일하고 왕업을 중원에 확립해야 합니다. 신은 이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전력 투구하고 죽고 나서야 그만둔다는[死而後已] 각오로 출정합니다." 사이후이는 제갈 량이 왕업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전력 투구한다는 데서 유래하듯이 어떤 일을 할 때 최선을 다한다는 뜻도 들어 있다. 《논어(論語)》의 〈태백편(泰伯篇)〉에도 나온다. 효성이 지극하고 노(魯)나라에서 후학 양성에 주력한 증자(曾子:BC 506~BC 436)는 선비 본연의 참모습을 "선비는 인(仁)을 자기의 본연의 임무로 삼아야 하는데, 이것이 어찌 무겁지 않겠는가. 죽은 뒤에야 끝나는 일이니[死而後已] 머나먼 길이다."라고 하였다. 동의어는 폐이후이(斃而後已: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고 힘쓴다는 뜻)이다. ▶ 삼고초려 (三顧草廬) / (三顧之禮) [ 三 : 석 삼 / 顧 : 돌아볼 고 / 草 : 풀 초 / 廬 : 오두막집 려 초가집을 세 번 찾아간다는 뜻으로, 사람을 진심으로 예를 갖추어 맞이한다는 것을 비유한 말. 《삼국지(三國志)》의 〈촉지 제갈량전(蜀志 諸葛亮傳)〉에 나오는 말이다. 후한(後漢) 말기 관우(關羽:?~219)와 장비(張飛:166?~221)와 의형제를 맺고 무너져 가는 한(漢)나라의 부흥을 위해 애를 쓴 유비는 능력을 발휘할 기회를 잡지 못하고 허송 세월만 보낸 채 탄식하였다. 유비는 유표(劉彪)에게 몸을 맡기는 신세로 전락하였다. 관우와 장비와 같은 강한 군사력이 있으면서도 조조(曹操)에게 여러 차례 당하였다. 유비는 그 이유를 유효 적절한 전술을 발휘할 지혜로운 참모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유능한 참모를 물색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유비는 채모(유표의 부하)의 계략을 피하려다 길을 잃고, 우연히 은사(隱士)인 사마휘(司馬徽)를 만나게 된다. 사마휘에게 유능한 책사를 천거해 달라고 부탁하자 사마휘는 "복룡(伏龍)과 봉추(鳳雛) 가운데 한 사람만 선택하시지요"라고 말하였다. 유비는 복룡이 제갈 량임을 알고 그를 맞으러 장비와 관우와 함께 예물을 싣고 양양(襄陽)에 있는 그의 초가집으로 갔는데, 세 번째 갔을 때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이때 제갈 량은 27세, 유비는 47세였다. 삼고지례는 유비가 제갈 량을 얻기 위해 그의 누추한 초가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간 데서 유래하는데, 유능한 인재를 얻기 위해서는 인내심을 발휘하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뜻이 들어 있다. 또한 인재를 알아 볼 줄 아는 안목도 또한 갖추어야 한다. 유비는 제갈 량을 얻은 이후 자신과 제갈 량의 사이를 수어지교(水魚之交:물고기가 물을 만난 사이)라고 말하였다. 제갈 량은 원래 미천한 신분으로 이곳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면서 숨어 지냈다. 그는 스스로를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 비유하였지만 최주평(崔州平)과 서서(徐庶)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아 주지 않았다. 그는 뜻을 펼칠 때를 기다린 것이었다. 제갈 량은 이후 《출사표(出師表)》에서 자기를 찾은 유비의 지극한 정성에 대해 감격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신이 비천한 신분임을 알면서도 싫어하지 않고 외람되게도 몸을 낮추어 제 초가집을 세 번씩이나 찾아 주어 당시의 상황을 물으셨습니다. 이 일로 저는 감격하여 선제께서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을 허락한 것입니다." 줄여서 삼고라고 하며, 삼고초려(三顧草廬) 또는 초려삼고(草廬三顧)라고도 한다. 비슷한 말로 삼고지우(三顧知遇)가 있다. ▶ 세한지송백 (歲寒之松柏)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른 기상은 겨울이 되어야 안다.
조조에게 투항한지 얼마 안되어 다시 관우와의 전투에 참여한 방덕이, 패한 뒤 절개를 지켜 목숨을 버린 것을 일컫는 말이다. ▶ 소향무적 (所向無敵) 이르는 곳마다 맞설 싸울 사람이 없다는 뜻으로, 막강한 세력을 뜻한다.
조조가 형주를 얻고는 기고만장해져서 손권에게 투항하라는 뜻을 암시하는 편지를 보냈는데, 주유가 이에 반대하면서, '우리 군은 가는 곳마다 이기고 대등하게 대적한 자들이 없었습니다'고 하였다. ▶ 수어지교 (水魚之交)[ 水 : 물 수 / 魚 : 물고기 어 / 之 : 갈 지 / 交 : 사귈 교 ] 매우 친밀하게 사귀어 떨어질 수 없는 사이.
원래 물과 고기의 사귐이란 뜻으로, 고기가 물을 떠나서는 잠시도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관계에 비유한 말이다. 어수지친(魚水之親)이라고도 하는데, 부부 사이나 남녀가 매우 사랑하는 것을 어수지락(魚水之樂)이라고도 한다. 이 말은 중국 삼국시대의 유비(劉備)와 제갈 량(諸葛亮)의 사이를 비유한 데서 비롯된다. 《삼국지》 <제갈량전(諸葛亮傳)>을 보면, 유비와 제갈 량과의 사이가 날이 갈수록 친밀하여지는 것을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불평하자, 유비가 그들을 불러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다는 것은 고기가 물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는 불평을 하지 말도록 하게(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勿復言)”라고 타일렀다. 이리하여 관우와 장비는 다시는 불평하지 않았다고 한다. ▶ 수화불상용 (水火不相容) 물과 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는 사이를 뜻한다.
촉의 명장 위연은 국내에서 그를 당해낼 자가 없어서 누구든 두렵게 여겼는데, 오직 장사 양의만이 그를 탐탁히 여기지 않고 그와 자주 맞서곤 했다. 유) 유여수화(有如水火) ▶ 순망치한 (脣亡齒寒)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리다는 말로 서로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라는 뜻.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희공 5년조에 나오는 말이다. 춘추시대 말엽(B.C. 655), 진(晉)나라 헌공은 괵나라를 공격할 야심을 품고 통과국인 우나라 우공에게 그곳을 지나도록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우나라의 현인 궁지기(宮之寄)는 헌공의 속셈을 알고 우왕에게 간언했다. “괵나라와 우나라는 한몸이나 다름없는 사이오라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망할 것이옵니다. 옛 속담에도 수레의 짐받이 판자와 수레는 서로 의지하고(輔車相依),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脣亡齒寒)고 했습니다. 이는 바로 괵나라와 우나라의 관계를 말한 것입니다. 결코 길을 빌려주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뇌물에 눈이 어두워진 우왕은 “진과 우리는 동종(同宗)의 나라인데 어찌 우리를 해칠 리가 있겠소?”라며 듣지 않았다. 궁지기는 후환이 두려워 “우리나라는 올해를 넘기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가족과 함께 우나라를 떠났다. 진나라는 궁지기의 예견대로 12월에 괵나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도 정복하고 우왕을 사로잡았다. 이때부터 입술과 이의 관계처럼 결코 끊어서는 안 되는 관계를 가리킨다. 동의어로 순치지국(脣齒之國)·순치보거(脣齒輔車)가 있으며, 유사어로 조지양익(鳥之兩翼)·거지양륜(車之兩輪)이 있다. ▶ 식소사번 (食少事煩)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다, 즉 몸을 돌보지 않고 바쁘게 일한다는 뜻.
두번 째 출사표를 내고 위나라 공략에 나선 제갈 량이 사마 의와 대치하고 있을 때이다. 제갈 량은 속전속결하려고 했으나 사마 의는 제갈 량이 지치기만을 기다리며 지구전을 펼치고 있었다. 서로 대치하고 있는 가운데 사자들만 자주 오고 갔다. 하루는 사마 의가 촉의 사자에게 “공명은 하루 식사와 일처리를 어떻게 하시오?” 하고 물었다. 사자는 “승상께선 새벽부터 밤중까지 손수 일을 처리하시며 식사는 아주 적게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사마 의는 “먹는 것은 적고 일은 많으니 어떻게 오래 지탱할 수 있겠소?(食少事煩 安能久平)”라고 말했다. 사자가 돌아와 사마 의의 말을 전하니 “그 말이 맞다. 나는 아무래도 오래 살지 못할 것 같다.”라고 제 갈량은 말했다. 결국 제갈 량은 병이 들어 54세의 나이로 오장원에서 죽었다. 그러므로 건강을 돌보지 않고 일만 많이 하는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요즈음에는 생기는 것도 없이 헛되이 바쁘다는 뜻으로도 쓰인다. ▶ 식자우환 (識字憂患) 글자를 아는 것이 오히려 걱정을 끼친다는 말로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걱정도 그만큼 많다는 뜻.
유비에게 제갈 량을 소개했던 서서(徐庶)가 유비의 군사로 있으면서 조조를 많이 괴롭혔다. 조조는 모사꾼인 정욱의 계략에 따라 서서가 효자라는 것을 알고 그의 어머니를 이용하여 그를 끌어들일 계획을 세웠다. 서서의 어머니 위부인은 학식이 높고 의리가 투철한 여장부로 서서에게 현군을 섬기도록 격려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위부인의 글씨를 모방한 거짓편지를 써서 서서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다. 나중에 위부인은 서서가 조조의 진영으로 간 것이 자기에 대한 아들의 효심과 거짓편지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고 “여자가 글씨를 안다는 것부터가 걱정을 낳게 한 근본 원인이다(女子識字愚患).”라며 한탄하였다. 소동파의 시에 “인생은 글자를 알 때부터 우환이 시작된다(人生識字憂患始).”라는 구절도 있다. 너무 많이 알기 때문에 쓸데없는 근심도 그만큼 많이 하게 되는 것, 또는 어줍잖은 지식 때문에 일을 망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한국 속담에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 신은구의 (新恩久義) 새로운 은혜, 오래된 의리라는 뜻으로,
은혜는 조조에 대한 것이요, 의리는 유비에 대한 것이다. 관우는 이렇게 말을 하면서 조조의 호의에 감사히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유비를 잊지 않았다. ▶ 양상군자 (梁上君子) '대들보 위에 있는 군자' 즉 도둑을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쥐를 가리키기도 한다.
《후한서(後漢書)》 〈진식전(陳寔傳)〉에 나오는 말이다. 진식은 학식이 뛰어나고 성질이 온화하며 청렴결백하여 모든 사람의 존경을 받았다. 그가 태구현(太丘縣)의 현감으로 있을 때 어느날 밤 도둑이 그의 방으로 들어와 천장 들보 위에 웅크리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진식은 곧 의관을 정제하고 아들과 손자들을 불러들여 훈계를 시작하였다. "사람이란 누구나 자기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착하지 못한 짓을 하는 사람도 반드시 처음부터 악한 사람은 아니다. 평소의 잘못된 버릇이 성격으로 변하여 나쁜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저 들보 위의 군자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도둑은 이 말에 깜짝 놀라 얼른 들보 위에서 뛰어내려와 이마를 조아리며 죽여 주십사하고 사죄하였다. 진식은 그를 조용히 타이르고 비단 두 필을 주어 돌려보냈다. 이 일이 알려지자 고을 안에 도둑질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한다. ▶ 언과기실 (言過其實) 실제보다 말이 더 앞선다는 뜻.
제갈량이 마속을 높이 평가하자, 이에 대해 유비가 '그는 겉으로는 훌륭해 보이나 실제로는 대단한게 없으므로 그를 높이 기용하지 말아라'고 충고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을 죽일 때 이 글귀를 떠올리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언출위론 하필성문 (言出爲論 下筆成文) 말을 하면 경론이고 붓만 들면 명문이라는 뜻. 건안문단의 일인자로 꼽히는 조식에 대한 평이다. ▶ 오관육참 (五關六斬) 다섯 관문에서 여섯 명을 벤다는 뜻.
관우가 원소 밑에 있던 유비를 만나기 위해 그를 가로막는 다섯 관문의 장수 여섯을 베었다. 그의 충절을 기리는 고사성어. 참고) 동령 - 공수 낙양 - 한복, 맹탄 기수 - 변희 형양 - 왕식 활주 - 진기 유) 오관참장(五關斬將) ▶ 우도할계 (牛刀割鷄) 소 잡는 칼로 닭을 잡는다는 뜻.
동탁이 사수관을 지킬 장수를 뽑을때 여포를 보내려 하자, 화웅이 여포를 소 잡는 칼, 손견을 닭에 비유하며 자신의 출전을 요청하였다. 유) 할계언용우도(割鷄焉用牛刀) ▶ 원문사극 (轅門射戟) 여포가 원문에서 150보 거리에 놓아둔 화극의 곁가지를 화살로 쏘아 맞춘 일. 이로써 교전을 앞두던 원술의 부장 기령과 유비는 화해를 하게 되었다. ▶ 육출기산, 구벌중원 (六出祁山, 九伐中源) 기산에 여섯번 나가고, 중원을 아홉번 어우른다는 뜻 . 각각 제갈량과 강유가 북벌을 여섯번, 아홉번 시도한 것을 뜻한다. ▶ 읍참마속 (揖斬馬謖) 사사로운 감정을 버리고 엄정히 법을 지켜 기강을 바로 세우는 일에 비유하는 말.
울며 마속(馬謖)의 목을 벤다는 뜻으로 《촉지(蜀誌)》 〈마속전(馬謖傳)〉에 나오는 말이다. 촉(蜀)나라의 제갈 량(諸葛亮)은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자기의 명령·지시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싸우다가 패한 부장(部將) 마속을, 그 전날의 공과 두터운 친분에도 불구하고 울며 목을 베어 전군의 본보기로 삼았다는 고사에서 비롯되었다. ▶ 일룡분이호 (一龍分二虎) 한 마리의 용이 두 마리의 호랑이를 갈라놓다.
관우와 장비의 싸움을 말린 유비에 대해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 절영지회 (折纓之會) 갓끈을 끊는 연회라는 뜻. 옛 고사에서 비롯됨.
이유가 이 고사를 예로 들어 동탁에게 간언하길 초선을 여포에게 내리면 여포의 충심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 종호귀산 (縱虎歸山)[ 縱 : 놓을 종 / 虎 : 호랑이 호 / 歸 : 돌아갈 귀 / 山 : 뫼 산 ] 호랑이를 풀어놓아 산으로 돌아가게 한다는 뜻으로, 화근(禍根)을 남겨두는 것을 비유한 말.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에서 유비(劉備)를 두고 한 말이다. 서주(徐州)의 여포(呂布)와 싸워서 패한 유비는 조조(曹操)를 찾아가 의지하였다. 조조는 유비를 기꺼이 맞아 잔치를 베풀어 환영하고 예주목(豫州牧)에 봉했다. 그러자 조조의 부하 정욱(程昱)이, “유비는 큰 뜻을 품어, 영웅의 기개가 있습니다. 지금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화근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곽가(郭嘉)가 반대하며 말하기를, “모처럼 의지해 온 사람을 죽인다면 승상의 명예를 손상시키고 천하 통일에 방해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는 곽가의 의견을 따랐다. 이듬해 기주(冀州)의 원소(袁紹)에게 그 아우 원술(袁術)이 옥새를 가지고 가므로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였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자리에 유비도 있었는데, 이 기회를 이용해 조조로부터 탈출할 생각을 하였다. 유비가 조조에게 말하기를, “원술이 원소를 찾아가려면 반드시 서주를 지나갈 것입니다. 내가 부대를 이끌고 이들을 맞아 쳐서 원술을 사로잡아 오겠습니다.” 하였다. 다음날, 유비는 헌제를 배알하고 출정을 허락 받았다. 조조는 유비에게 군사 5만을 주고 주령과 노소로 하여금 유비를 감시하게 하였다. 유비가 허창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침 외지로 나가 있던 정욱과 곽가 두 사람이 돌아와 이 말을 듣고 급히 조조를 찾았다. 정욱이 말하였다. “전에 그를 죽이라 진언하였을 때, 승상은 듣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에게 병마를 주는 것은, 호랑이를 풀어놓아 산으로 돌려보내는[縱虎歸山] 것과 같습니다. 즉시 되돌아오게 해야 합니다.” 그제 서야 조조가 급히 사람을 보내어 철군을 명하였지만, 유비는 듣지 않았다. 이를 기회로 하여 유비는 훗날의 삼국 정립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 진복론천 (秦宓論天) 촉의 진복이 오의 사신 장온과 하늘에 대해 논한 일. 여기서 장온은 진복의 논리정연한 말과 해박한 지식에 감복하였다고 한다. ▶ 창서칭상 (倉舒秤象) 조조의 아들 창서가 오에서 보내온 코끼리의 무게를 잰고사를 말한다. 조창서는 이름이 충이고 창서는 그의 자이다. 조조가 그의 아들중 가장 총애할만큼 재주가 남달랐지만, 13세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하여 빛을 보지 못하였다. ▶ 천계일봉 (千鷄一鳳) 닭 천 마리 중에 봉황이 한 마리가 있다는 뜻.
황건적 장수인 절천야차 하만이 조조 군영을 농락하며 등장하자, 조홍이 이렇게 외치며 그와 맞섰다. ▶ 청경우독 (淸耕雨讀) 맑을 땐 밭을 갈고 비가 올 땐 책을 읽는다. 제갈량이 융중에서 이런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 칠종칠금 (七縱七擒)[ 七 : 일곱 칠 / 縱 : 놓을 종 / 七 : 일곱 칠 / 擒 : 사로잡을 금 ] 일곱 번 잡았다가 일곱 번 풀어준다는 뜻으로, 상대를 마음대로 다룸을 비유하거나 인내를 가지고 상대가 숙여 들어오기를 기다린다는 말. 제갈량(諸葛亮)이 맹획(孟獲)을 사로잡은 고사에서 비롯된 것으로, '마음대로 잡았다 놓아주었다 함'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로 '칠금(七擒)'이라고 줄여서 부르기도 한다. 《삼국지(三國志)》에 다음의 이야기가 나온다. 삼국시대 촉한(蜀漢)의 제1대 황제인 유비(劉備)는 제갈 량에게 나랏일을 맡기고 세상을 떠났다. 제갈량은 후주(後主)인 유선(劉禪)을 보필하게 되었는데, 그때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위(魏)나라를 공략하여 생전의 유비의 뜻을 받들어야 했던 제갈 량은 먼저 내란부터 수습해야 했다. 유선이 아직 어리고 철이 없어 군대를 동원하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한 제갈 량은 적진에 유언비어를 퍼뜨려 이간책을 썼다. 과연 반란군은 자중지란(自中之亂)을 일으켜 서로 살육을 일삼았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등장한 반란군이 바로 맹획이라는 장수였다. 맹획이 반기를 들자 제갈량은 노강 깊숙이 들어가 그를 생포했다. 제갈량의 계략에 걸려들어 생포된 맹획은 분함을 이기지 못했다. 맹획을 생포한 제갈량은 오랑캐로부터 절대적 신임을 받고 있는 그를 죽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촉한의 무장인 마속(馬謖)도 '용병의 도리는 최상이 민심을 공략하는 것으로, 군사전은 하책일 뿐 심리전을 펴 적의 마음을 정복하라'고 했다. 제갈 량은 오랑캐의 마음을 사로잡고 나면 그들의 인적, 물적 자원을 바탕으로 북벌(北伐)도 한결 용이할 것이라 생각하여 맹획을 풀어주었다. 고향에 돌아온 맹획은 전열을 재정비하여 또다시 반란을 일으켰다. 제갈량은 자신의 지략을 이용하여 맹획을 다시 사로잡았지만 또 풀어주었다. 이렇게 하기를 일곱 번, 마침내 맹획은 제갈량에게 마음속으로 복종하여 부하 되기를 자청했다. 여기서 '칠종칠금'이란 말이 나왔으며, 오늘날 이 말은 '상대편을 마음대로 요리한다'는 뜻으로 비유되어 사용된다. ▶ 침불안석, 식불감미 (寢不安席, 食不感味) 누워도 자리가 편치 않고, 먹어도 맛을 느끼지 못한다는 말.
제갈량의 출사표에 나오는 말로, 위로 강대한 적을 둔 그의 심정을 잘 드러낸다. ▶ 탄금주적 (彈琴走賊) 거문고를 울려 적을 쫓아낸다는 뜻.
제갈량이 가정전에서 패한 후 서성에서 사마의의 10만 대군과 맞설 때, 단 3천 병력으로 적을 막아내지 못함을 알고 거문고 울림으로 손쉽게 적을 쫓아냈다. 참고) 이때 사용된 계책이 공성지계이다. ▶ 투서기기 (投鼠忌器) 쥐를 잡다가 독을 깬다는 뜻.
허전의 사냥에서 조조의 방자한 행동을 목격한 관우가 칼을 들어 그를 베려 할 때, 유비가 가만히 그를 만류하며 이말을 하였다. ▶ 파죽지세 (破竹之勢)[ 破 : 깨뜨릴 파 / 竹 : 대 죽 / 之 : 의 지 / 勢 : 기세 세 ] 대나무를 쪼갤 때의 맹렬한 기세라는 뜻으로, 세력이 강대해 감히 대적할 상대가 없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다음은 《진서(晉書)》〈두예전(杜預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진(晉)나라의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 두예(杜預)가 진무제(晉武帝)로부터 출병 명령을 받아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오(吳)나라를 쳐서 삼국시대의 막을 내리고 천하통일을 이룰 때의 일이다. 출병한 이듬해 음력 2월, 무창(武昌)을 점령한 두예는 휘하 장수들과 오나라를 일격에 공략할 마지막 작전회의를 열었다. 이때 한 장수가 '곧 강물이 범람할 시기가 다가오고, 또 언제 전염병이 발생할지 모르니 일단 후퇴했다가 겨울에 다시 공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했다. 그러자 두예는 단호히 명령조로 대답했다. "지금 우리 군사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듯이 높다. 그것은 마치 '대나무를 쪼갤 때의 맹렬한 기세[破竹之勢]'와 같다. 대나무란 일단 쪼개지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칼날을 대기만 해도 저절로 쪼개지는 법인데, 어찌 이런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있단 말인가." 두예는 곧바로 군사를 재정비하여 오나라의 도읍인 건업(建業)으로 진격하여 그야말로 파죽지세처럼 몰아쳐 단숨에 건업을 함락시켰다. 오왕 손호(孫晧)는 손을 뒤로 묶고 수레에 관을 싣고 사죄의 뜻을 보이며 항복해왔다. 이리하여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두예는 오나라를 평정한 공으로 당양현후(當陽縣侯)에 봉해졌으나, 만년에는 학자로서 학문과 저술에 힘을 기울여 《춘추석례(春秋釋例)》《좌전집해(左傳集解)》 등의 저서를 남겼다. 오늘날 이 말은 거침없이 일이 잘 풀리거나 처리됨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된다. '세여파죽(勢如破竹)', '영도이해(迎刀而解)'와 같은 뜻으로 쓰인다. ▶ 할수기포 (割鬚棄袍) 수염을 자르고 도포를 버린다는 뜻.
동관에서 마초와 맞닥뜨린 조조가 그에게 패하여 도망갈 때, '비단 도포를 입은 자가 조조다!'라는 말에 도포를 버리고, '수염이 긴 자가 조조다!'라는 말에 수염을 잘랐다고 한다. ▶ 호부견자 (虎父犬子) 호랑이 아들에 개 아들이라는 말로,
촉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운 유비에 비하여 그 나라를 주색으로 망쳐버린 우매한 아들 유선을 비교한다. ▶ 홍문연회 (鴻門宴會) 유비와 조조가 영웅에 대하여 논하고 있을 때, 갑자기 관우와 장비가 들이닥치면서 '칼춤이라도 추어보이기 위해 달려왔습니다'라고 하자, 조조는 그들의 충심에 감복하면서, '이곳은 홍문의 연회가 아니니 칼을 들 필요는 없을 것이오'라고 답하였다. 참고) 홍문연회란 항우가 모사 범증의 말에 따라 홍문이라는 곳에서 유방을 죽이려 했던 일을 말한다. 범증은 항장이라는 장수를 시켜 칼춤을 추다가 은밀히 유방을 죽이도록 하였는데, 이를 알아챈 항백이라는 자가 같이 칼을 뽑고 춤을 추면서 항장의 행동을 저지하였다. 곧 유방의 장수인 번쾌도 칼을 뽑아들고 뛰어 들어 항장을 막았고, 낌새를 알아차린 유방은 곧 장 자리를 떠서 화를 면했다고 한다. 이 고사는 유비의 입촉에서도 인용된다. ▶ 화병 (畵餠) 그림 속의 떡에 불과하다'란 뜻으로 실력없이 명성만 화려한 자를 말한다. ▶ 회귤고사 (懷橘故事), 육적회귤(陸績懷橘) 중국 삼국 시대 오나라의 육적이란 사람이 여섯 살 때 원술이라는 사람을 찾아 갔을 때, 귤 대접을 받고는 그 중에 몇 개를 품에 품었는데, 하직 인사를 할 때 그것이 흘러 나와 발각되었다. 이에 원술이 그 까닭을 물으니, 집에 가지고 가서 어머니께 드리려 하였다 하였으므로 모두 그 효심에 감동했다는 일화로서, 부모님에 대한 지극한 효성을 가리킬 때 쓰는 말이다.
[출처 : 다음카페 '향기로운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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