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저녁에는 차범근축구교실 이사회 일정이 잡혀있어서 다음날 하는 아시안컵 8강전을 보러 호주에 갈수있는 형편이 못됐다.
우즈벡한테 지게 된다면 우리팀은 돌아와야했기 때문에 자칫 두리의 대표선수 마지막 경기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만약 그 모습을 못보게 된다면 두리한테는 미안하고 나 역시도 많이 아쉬울 것 같아서 무척 마음이 쓰였는데
우리팀이 4강에 오르게 돼서 정말 다행이다.
오늘 아내와 나는 두리의 마지막 남은 경기들이 될 준결승, 결승을 지켜보기 위해서 호주로 떠난다.
< 우리 국가대표팀과 두리를 응원하러 호주로 떠납니다 > < 호주현지, 길에서 음식을 먹는 즐거움 >
세월의 빠름을 실감하고있다.
두리가 엄마 뱃속에 있을때, 태어났을때도 프랑크푸르트 신문들은 'zweite chaboom' 이 태어날 거라면서
스포츠지 한면 가득 채우면서 기다렸던 기억이 엊그제 인것 같은데 두리가 벌써 국가대표유니폼을 벗는다고 한다.
두리보다는 내가 더 아쉬운 것 같다.
'국가대표선수 아들' 은 나에게 정말 큰 자랑이었다.
사람들은 아버지인 나와 비교하느라 두리한테 만족을 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차붐의 아들' 은 팬들에게는 아쉬움이고 두리에게는 짐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두리의 존재는 '감사와 행복' 그 자체였다.
아내는 늘 얘기한다.
'당신한테 두리같은 좋은 아들을 선물한 것 만으로도 나는 당신에게 할 일을 다 한 것!' 이라고. 절대 맞는 말이다.
두리가 초등학교 1학년때 나는 복숭아뼈 밑을 지나는 힘줄이 닳아버려서 잘라내고 이어주는 큰 수술을 했다.
아래층에서 자고 있는데 새벽에 두리가 막 울어댔다.
놀라서 뛰어올라 갔더니 수술을 하고 깁스를 한 아빠처럼 하고싶어서 꼬마두리는 종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자다가
피가 안통하는 바람에 울고불고 난리가 난 것이다.
어려서 부터 두리는 '아빠처럼'이 꿈이고 희망이었다.
그때는 나중에 축구선수로 돈 많이 벌어서 엄마한테 비행기를 사주겠다고 약속하는걸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그 약속은 점점 줄어들어서 이제는 자기집 청소하는 아주머니 수고비도 떼어먹고 대신 내준 엄마랑 싸우고 있다.
축구.
나는 두리가 은퇴를 안하고 오래오래 축구선수였으면 좋겠다.
아버지가 운동장에 가서 아들이 축구하는 것을 보는 즐거움을 두리는 아직 모를것이다.
또 아들 두리랑 축구얘기를 할 때마다 느끼는 그 뿌듯함은 아들의 입장 에서는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할수 없는 기분이다.
이제는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진 두리가 세계축구를 자유롭게 얘기하면서 전술적 논리를 펼때면
든든하고 자랑스럽고 뿌듯하고... 갖가지 감정이 다 섞여서 나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으로 만들어준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두리한테서 문자가 날라왔다.
'공항에서 리티[리틀바흐스키] 만났어요. 아빠한테 안부전해달래요.'
'나도 호주에 올거라고 얘기했어?'
'얘기했어요'
리틀바흐스키는 90년 월드컵을 우승한 독일의 스타다.
이제는 아빠의 친구들이 거의 모두 두리의 친구들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두리가 시원찮다고 하지만 독일에 가면 내 친구들은 '월드컵에서 뛰는 국가대표 선수 아들'을 엄청나게 부러워 한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눈치보며 숨죽이고 있다가도 독일에만 가면 친구들에게 어깨를 펴고 자랑을 한다.
축구선수 아버지들은 모두 '축구선수 아들'을 꿈꾼다.
나도 내 친구들도 모두 그렇다.
그러나 '국가대표선수 아들, 월드컵에서 뛰는 아들'을 가진 친구들은 없다.
나 혼자다. 하하하.
이렇게 독일에만 가면 대놓고 자랑을 멈추지 않는 나를 아내는 유치하다고 뭐라 그런다.
이름깨나 날리던 왕년의 스타들이 만나서 자신들보다 훨씬 못한 자식들인데도 서로서로 자식 자랑하느라
침을 튀기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이빨 빠진 아버지들의 모습 그대로다.
하하하. 좀 그러면 어떤가.
레버쿠젠에서 나하고 오래 뛰었고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잠깐 선수생활을 했던 국가대표를 지낸 알루이스는
자기 아들이 분데스리가를 200경기가 넘게 뛰었다며 자랑이고
브라질의 득점왕이었던 티타는 '우리딸이 피파 브라질에서 일한다'는 얘기를 수도 없이 하고 또 하는게 부모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보다 두리를 좋아해주는 사람을 아내는 더 좋아한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다.
< 남아공 월드컵 당시, 키커지 프란쯔케 부장과 당시 호주 대표팀 감독 홀가 오직. 내 친구들을 모두 접수한 두리.. >
나는 어디를 가도 아내가 없으면 불편하다. 소극적이고 사람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성격때문이다.
그러나 두리는 다르다. 이미 내 친구들은 자기 친구들로 다 접수를 끝낸것 같다. 남
아공 월드컵에서 하도 요란스럽게 눈물을 훔치며 울어댔던 탓에 왠만한 축구인들은 우리아들을 기억한다.
"그 울었던 애가 느네 아들이었지?"
그래서인지 두리를 만나면 나를 보는듯 반가워한다.
독일말도 나보다 훨씬 더 잘하고 영어도 곧잘하는것 같다.
슈틸리게 감독에게도 나를 생각하면서 아빠에게 하듯이 그의 입장을 이해 하려고 애를 쓴다.
나로서는 그렇게 두루두루 잘지내는 두리가 신기하고 고맙다.
월드컵이 끝나고 두리가 대표선수로 다시 발을 디디고 첫 합숙을 마쳤을때, 신태용코치가 두리에게 진심으로 한마디 했다고 한다.
"나는 사실 너가 부담스러웠는데 지내고 보니 너같은 놈도 있구나! 하는게 신기했다!"고.
'차범근의 아들'이 두리에게 굴레인 것은 틀림없다.
특히 축구하는 사람들로서는 '차범근의 아들'이라는 존재가 부담스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식사를 하면서 두리가 이 얘기를 하자 큰딸 하나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서 나는 어디를 가도 아빠가 차범근이라는 말을 절대 안 해.
그걸 아는 순간 사람들이 자연스럽고 편하게 나를 보지 않아서 불편해."
그렇군.
그래도 두리가 내 아들이라서 더 많이 사랑해 주는 사람들도 꽤 있다는 것을 좀 알아주면 안될까?
내가 저렇게 빨리 달리수 있는 피도 물려줬는데.
어차피 두리는 아빠가 차범근이라는 것을 감출수도 없는데. 하하.
< 중국, 멕시코..여러나라 감독으로 월드컵을 누볐던 내친구 보라 밀루티노비치. 두리친구가 된지 이미 오래다 >
두리가 대표선수가 되고 10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사람들은 대놓고 나보다 두리를 더 좋아하게 됐다.
예전에는 그나마 어른들은 내 편이었는데 이제는 아줌마들도 두리편이다.
어디를 가도 두리를 더 보고싶어한다.
아내도 차범근아내보다는 두리엄마로 불리우기를 더 바란다.
나도 이제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꼬마들에게 '내가 차두리아빠다'고 스스로 소개한다.
이제 며칠 후면 내 인생의 자랑거리 하나가 과거속으로 들어간다.
아쉽고 고맙고 미안한, 복잡한 마음이다.
"아빠, 단장님이 아빠 언제 오시냐고 기다리세요. 얼른 오세요!"
아빠가 빨리 오기를 기다려주는 아들이라서 더 고맙다.
두리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말하면 아내가 섭섭하겠지.
고쳐서 말해야겠다.
두리는 아내가 나에게 준 내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라고. 환갑을 넘기면서 터득한 노련함이다.
하하하.
ⓒ 다음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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