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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탐구생활

한 대 5백만원… 한국산 명품 기타를 만드는 사나이

by 뚜시꿍야 2008. 7. 5.
  한 대 5백만원… 한국산 명품 기타를 만드는 사나이
 


엄태흥은 한 달에 한 대씩, 일 년에 기타를 딱 12대 만든다.“ 죽는 순간까지 기타 만들다가 죽겠다”라고 그가 말했다. 올해로 기타 제작 43년째. 1932년 아버지가 시작한 기타 제작이 21세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 사진=엄홍식

[박종인이 만난 외길 인생] 기타匠人 엄태흥

1997년 세상을 뜬 엄상옥은 평생 기타를 만들었다. 1932년부터 기타를 만든 한국 기타 장인(匠人) 1호다. 1960년대 숭례문 중수 때 얻은 550년 된 금강송(金剛松) 송판으로 만든 기타는 지금도 묵직하게 저음을 울어댄다.

아들 엄태흥(66)도 기타를 만든다. 매일 새벽 3시 잠에서 깨어 작업실로 들어가 하루 종일 공구와 나무와 접착제와 씨름하며 한 달에 딱 한 대씩 기타를 만든다. 1년에 12대, 가격은 300만원이다. '명기(名器)'라 자부하는 500만원짜리 기타도 서너 대 있다. 그는 "20년 전에 사둔 나무 판들 아껴뒀다 죽는 순간까지 기타 만들겠다"고 했다.

■한국 기타 장인 1호 엄상옥

엄상옥이 19세 되던 1932년, 그는 갓 한국에 보급된 기타에 빠졌다. 이웃집 형이 연주하는 기타 음색에 빠져버린 그는 그 기타를 어렵게 빌려 연구했다. 비싼 남의 기타를 분해하지도 못했고 참고서도 없었지만 그는 기타를 만들어냈다. 호기심으로 시작한 기타 제작이 일제강점기에서 전쟁, 세월을 훌쩍 넘겨 1997년 사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6·25가 터지자 엄상옥은 충남 홍성으로 피란갔다. 서울 수복 후 돌아와보니 서울의 집도 공장도 사라지고 없었다. 동생 집 마당을 빌려 시멘트 블록으로 두 칸 집을 지었다. 한 칸은 살림방, 하나는 작업실. 거기에서 엄상옥은 다시 기타를 만들기 시작했다.

일제 치하에 전쟁까지 겪은 나라에 악기를 만들 악기목(樂器木)이 있을 리 없었다. 악기목은 10년, 20년 건조한 나무를 써야 비틀어지지 않고 소리도 고르게 낸다. 엄상옥은 미군이 쓰다 버린 기타, 중고 가구를 구해 기타를 만들었다. 그 기타를 들고 미군부대로 가면 미군들이 악기를 사갔다.

전쟁이 끝나고 엄상옥은 '다이야몬드 기타'라는 상호를 내걸었다. 외국 연주가들의 녹음테이프를 구해 듣고 기타를 만들어 연주도 해봤다. 음이 다르게 들리면 부수고 다시 만들었다. 어느 틈에 엄상옥제 기타가 제 음을 내기 시작했다.

서울 왕십리 다이야몬드 기타 작업실은 예인(藝人)들의 사랑방이었다. 수제(手製) 다이야몬드 기타는 동호인들과 연주가들 사이에 명품으로 소문이 났다. 연주가, 기타 교사들이 작업실로 와 기타를 연주하고 기타를 사갔다. 전흔이 가시자 기타 제작을 배우려는 사람들도 찾아왔다. 다 가르쳐줬다. 내로라하는 기타 장인들이 모두 그의 제자들이다.

1960년 숭례문 보수공사 때 금강송 목재가 나왔다. 550년 동안 건조된 최고의 악기목이다. 버리려던 이 나무를 엄상옥이 구해 기타 3대를 만들었다. 그 즈음 괴테문화원 초청으로 한국에 공연왔던 베를린음대 교수이자 기타리스트인 지그프리트 베렌트가 이 기타를 보고 평했다. "맑고 쾌적한 육성과 비슷한 음을 가진 뛰어난 연주용 악기다."

엄상옥은 그에게 숭례문 기타를 증정했다. 또 한 대는 안드레스 세고비아의 지음(知音)인 미국 연주가 소포클레스 파파스에게 갔다. 국내에 하나 남은 숭례문 기타는 1980년대 초까지 오세춘, 금병준, 강우식 등 당대 명연주가들이 연주회에 사용했다. 이후 엄상옥은 생산 대수를 줄이고 명기를 만드는 데 치중했다. 죽기 전 엄상옥은 말했다. "내 인생에서 기타를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게 없다."

■어린 엄태흥의 추억

선친 엄상옥이 만든‘숭례문 기타’(맨 앞). 1960년 숭례문 보수공사 때 나온 550년 된 금강송으로 만들었다.
국내에 하나뿐인 숭례문 기타는 둘째 아들 엄태흥이 가지고 있다. 아들이 말했다. "처음에는 기타 만들 생각이 없었다. 학교 갔다 와 보면 2층 작업실에 연탄 난로 피워놓고 가난한 제작자들이 가난하게 앉아 있었다. 그렇게 살기 싫었다."

기타라는 것이 입는 것도 먹는 것도 잠잘 때 쓰는 것도 아니다. 가난한 나라에서 악기 만들어 파는 것, 그리 좋은 사업 아이템도 아니었다. 소년 엄태흥은 절대 가업을 잇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대신 연주를 했다. 작업실 찾은 연주가들이 소년에게 기타를 가르쳐줬다. 애잔한 기타 음색이 좋아 그는 기타리스트가 되기로 했다. 군대에 가기 전 방송국에서 녹음한 자기 연주회 실황이 훈련소 라디오에서 흘러나왔을 때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내 손이 너무 작은 거예요. 기타 현을 짚으려면 손이 커야 하죠. 남들은 음악 할 고민하고 있는데 저는 코드 짚을 걱정을 하고 있으니 연주가로는 미달이죠."

가난한 기타 제작자의 아들. 그래서 유학을 갈 형편도 되지 않았다. 그래도 기타는 아주 좋았다. 1965년 결혼과 함께 그는 아버지로부터 독립해 '엄태흥 기타' 제작소를 차렸다. 엄태흥은 연주의 꿈을 제자들 통해 풀겠다고 마음먹었다.

■명기(名器)를 찾아서

기타는 함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기타 만드는 나무는 20년 넘게 건조시킨 독일제 스푸루스와 장미목, 단풍목이다. 국내에는 그런 재료가 없다. 그는 "재활용 재료 아니면 대충 말린 나무를 쓰다 보니 음질이 형편없었다"고 했다. 기타가 탄생한 유럽의 기타 제조 방식도 알지 못했다. 그저 아버지가 확립한 '한국형' 제조법을 개량하고 따라 할 뿐이었다.

전직 연주가요 신생 제작자 엄태흥이 속앓이하는 사이에 한국에 히피문화가 도래했다. 기타의 전성시대가 온 것이다. 장발에 청바지, 통기타가 청년문화의 상징이 됐다.

그는 "간첩사건 났을 때, 등록금 내는 학기초, 김장철 빼고는 쏠쏠히 기타가 팔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기타를 막 만들었다. 유신시대, 영문도 알 수 없는 간첩사건이 수시로 터졌지만 엄태흥의 공장에서는 뚝딱뚝딱 기타가 생산됐다.

80년대 들어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면서 풍족해진 대학생들 돈주머니는 악기점에서 술술 풀려 나왔다. 그런데 주머니가 두둑해지자 엄태흥의 가슴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정말 좋은 명기를 만들고 싶다…."

1989년 어느 날 평소 악기 판매를 위해 다이야몬드 기타와 엄태흥 기타를 자주 찾던 일본의 기타 장인 마쓰무라가 한국에 왔다. 엄태흥이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프랑스 장인에게 배우지 않았나. 나는 아버지한테 배웠지만 외국 것보다 못하다. 당신한테라도 배우고 싶다."

몇 번씩 못 들은 척 하던 장인은 엄상옥이 만든 숭례문 기타를 쳐보더니 "당장 내 작업실로 오라"고 했다.

그는 부푼 가슴을 안고 일본에 갔다. 마쓰무라는 열흘 내내 잠재우고 밥만 먹이더니 그냥 그를 돌려보냈다. "마음이 변한 거지요. 너무 열 받아서 울화통이 터져서 귀국했어요."

43년 동안 명품 기타 만들기에 인생을 바친 엄태흥.
몇 달 뒤 그는 안면이 있던 독일의 기타 제작자 가즈오 사토(64)에게 전화를 했다. 가즈오 사토는 17세 때 영국의 장인에게 날아가 기타 제작을 배운 한국계 일본인이다. 독일에 자리를 잡고 기타를 만들었는데 서독 정부가 자녀를 낳으면 출산장려금을 주는 정책을 내놓자 한 살 터울로 4남매를 내리 낳고서 월 500마르크의 출산장려금을 몽땅 악기목 사는 데 써버린, 기타에 미친 사람이다.

아내의 통역으로 그가 부탁했다. "지금 방식이 아닌, 옛날 방식을 알고 싶다. 당신이 배운 그대로. 기초부터 배우고 싶다." 가즈오가 그를 독일로 불렀다.

1990년 10월 가즈오는 작업실에서 노트 한 권을 내밀었다. 기타 설계 도면이다. 그리고 먼지 가득 쌓인 옛 도구상자를 열어줬다. 엄태흥은 석 달 동안 작업실에 살며 기타를 만들었다. 그는 한국어만 알았고 가즈오는 한국어를 몰랐다. 눈빛과 전문용어로 석 달간 대화했다. 그리고 가즈오의 '하산(下山) 허가'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가즈오 소개로 목재상에 가서 기타 재목의 명품 독일 스푸루스 목판도 대량 구입했다.

■명기(名器)를 만들다

"제가 만든 기타를 들고 연주가들을 불렀어요. 이 사람 저 사람 연주를 해보더니 이럽니다. '이거 사토 거랑 똑같다'라고요." 기분이 좀 그랬다. 한 달 뒤에 또 하나를 만들어 선보였다. 사람들이 말했다. "이것도 사토 기타다." "나 엄태흥은 어디에도 없는 겁니다. 어디 사토 냄새나 피우고 거들먹거리는 가짜."

춘몽(春夢)에서 깨어난 듯 엄태흥은 홀연히 깨우쳤다. "제작 노트도 기타도 다 치워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미친 듯이 공부하고 연구하고 정말 미친 듯이…."

대량생산은 집어치웠다. 자존심 문제였다. 엄태흥표 명기 만들기가 지상 목표가 됐다. 전기톱에 손가락 반 마디가 날아가기도 했고 전기 대패에 아예 손가락이 몽땅 날아갈 뻔도 했다.

독일 명장의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다 만든 기타에 줄 끼우기가 두려울 정도로" 창피했다. 2000년에는 단 한 대도 만들지 못했다. 작업실에서 연주할 때는 그럴 듯했는데 야외 연주장에 가니 소리가 '얕더라'고 했다. 그러다 "한 몇 년 가니까 내가 맡아도 사토 냄새가 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외면당하고 독일까지 가 배워온 기술이 사라지고 엄태흥 식 기타가 탄생했다.

"2002년 초에 만든 기타에서 드디어 소리가 팡팡 터지기 시작했어요. 왜 터졌는지는 모르겠어요. 득음(得音) 같다고 할까… 분명히 그 전과 똑같이 만들었는데 소리가 다른 거예요."

그제서야 가즈오의 말이 기억났다. "기타 장인의 기술은 뺏을 수도 없고 뺏길 수도 없고 배울 수도 가르쳐줄 수도 없다." 엄태흥 기타는 한 대에 500만원이다. "죽을 때까지 한 달에 한 대씩 만들 것"이라고 했다.

■장인(匠人) 3대 - 엄태흥 엄태창 엄용식

엄태흥의 동생 태창(54)도 기타를 만든다. '엄태창 기타'도 동호인들 사이에 선망의 대상이다. 엄태흥의 조카 용식(37)도 작은아버지 엄태창의 작업실에서 도제 수업을 받고 있다.

엄태창은 명품과 함께 비교적 저렴한 악기도 만든다. 큰형의 아들인 용식은 철저한 수작업인 엄태흥 작업실 대신 엄태창의 공장을 택했다. 엄태흥이 말했다. "우리 모두 택한 길입니다. 서로를 존중하고 가업을 잇지요. 저는 저는…, 나 죽고도 남을 악기 만들 겁니다. 엄태흥 기타." 지난 3일 그는 43년 동안 혹사한 대가로 끊어진 어깨 인대 수술을 받았다.

[박종인 기자 sen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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