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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아름다운 사람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의 ‘뉴 피치’

by 뚜시꿍야 2008. 9. 10.

 

조막손 투수 짐 애보트의 ‘뉴 피치’

 

1993년 9월4일이니까 벌써 15년이 흘렀습니다.
그날 저녁 미국 전역의 스포츠 뉴스 시간의 하이라이트는 바로 짐 애보트였습니다.
당시 뉴욕 양키스에서 선발 투수로 뛰던 애보트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상대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해 언론을 요란하게 장식했습니다.

애보트는 양키스 사상 왼손 투수로는 세 번째로 노히트를 기록한 선수가 됐습니다.

 

조막손 투수 애보트가 지난 93년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순간입니다. 그는 최근 장애인들의 취업을 위한 미연방노동국의 '피치 캠페인'의 대변인으로 왕성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 게티이미지/멀티비츠/스포탈코리아/나비뉴스 ▲


조지 모그리지(1917년 레드삭스 상대)와 데이브 리게키(1983년 레드삭스 상대)에 이은 위업이었고 후에 데이빗 웰스(1998년 트윈스 상대)가 퍼펙트게임을 기록하며 네 번째 왼손 노히트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 노히트 뒤에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애보트는 노히트 노런을 장식하기 5일전에 인디언스와 맞대결을 벌여 3.2이닝 동안 10안타를 맞고 7점을 내주며 대패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 팀을 5일 만에 다시 만나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으니 그의 대단한 투지와 능력이 더욱 돋보이던 대목입니다.  당시 미국 언론이 유난히 들끓었던 이유는 어떻게 보면 그의 막강한 좌완 투수로서의 능력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대부분 언론이 그의 오른손, 아니 정확히 말하면 오른손이 없다는 점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애보트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손이 없었고 그래서 ‘조막손 투수’로 더욱 알려졌습니다.

 

1967년 미시간 주 사우스필드에서 태어난 애보트는 오른손이 없었지만 어려서부터 모든 운동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런데 동네 꼬마들 중에 제일 빠른 공을 던졌던 애보트가 가장 많이 하던 훈련은 벽에 공을 튕긴 후 막아내는 것이었습니다. 오른손이 없었기 때문에 왼팔로 공을 던진 후 오른쪽 팔목이 올려놨던 글러브를 재빨리 왼손에 끼고 공을 잡아내는, 나름대로의 수비 방법을 터득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 훈련을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프로 선수가 된 후에도 애보트는 투수 땅볼을 절대 놓치지 않는 발군의 수비력을 과시했습니다. 

 

플린트 센트럴 고교 시절 그는 팀의 에이스 투수였을 뿐 아니라 풋볼 팀을 주 챔피언십까지 이끄는 발군의 쿼터백이기도 했습니다. 1985년 드래프트에서 블루제이스는 고교생 애보트를 36라운드에서 드래프트했지만 그는 프로 대신 미시간 대학의 야구부를 택했고, 1987년에는 야구 선수로는 최초로 미 전역의 최고 아마추어 선수에게 주어지는 ‘설리번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미시간 대학 3년 재학시절
통산 26승8패, 방어율 3.03이라는 좋은 성적을 남겼
으며,
대학 2학년 여름에는 미국 대표팀으로 선발되어 일본이나 쿠바에서 많은 시합
경험을 가졌다. 


1987년 ‘팬암 게임’에서 애보트는 쿠바 땅에서 25년 만에 쿠바를 꺾고 승리한 미국인 투수가 됐고 1988년에는 미국대표로 서울올림픽에 출전, 결승전에서 일본을 꺾고 승리 투수가 되기도 했습니다. 올림픽 금메달을 딴 후 애보트는 26승8패의 대학 성적을 뒤로하고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에 1라운드 8번째로 뽑혔습니다. 

 

마이너리그를 건너뛰고 곧바로 빅리그에 합류한 그는 프로 첫 시즌인 1989년 에인절스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돼 12승12패 평균자책점 3.92의 활약을 펼치며 팬들의 사랑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오른손이 없는 그가 빅리그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하는 모습은 일반 팬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장애 청소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상징적인 선수가 됐습니다.  통산 87승108패 평균자책점 4.25의 성적을 남기고 1999년 시즌 후 은퇴한 애보트는 미국 전역을 돌면서 강연을 통해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전달해 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친구들과 골프를 하고 가족들과 평온한 날들을 지냈습니다.

 

▲타석에 선 에보트

 

그런데 최근 애보트가 다시 '피치(PITCH)'를 시작했다는 소식입니다.
아, 물론 마흔살인 그가 은퇴를 깨고 다시 현역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아닙니다. 애보트는 미국 연방 노동국 산하 장애인 고용정책실에서 실시하는 캠페인의 대변인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캠페인의 이름이 'PITCH(Proving Individuals with Talent Can Help)'라니 어찌 보면 애보트에게는 숙명적인 임무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능력있는 개개인들(장애인들)이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입증한다'는 의미의 이 캠페인의 머리 글자를 딴 것이 '피치', 즉 공을 던진다는 단어가 됐으니 말입니다.  이 캠페인의 주된 목표는 장애인들에게 직업을 찾아주는 것입니다.  노동국의 부서기관인 닐 로마노의 요청으로 첫 미팅을 한 애보트는 4시간여에 걸친 장거리 회의에서 많은 이야기들을 들었습니다. 특히 미국에 거의 5000만 명에 가까운 장애인들이 있으며 그들 중에 3분의2는 무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번 캠페인에 동참하기로 결심을 했습니다.

 

그는 이제 그가 야구를 통해 이뤘던 업적을 통해 여러 회사나 대중들에게 다시 다가가려고 합니다. 오른손이 없이 태어난 그가 야구의 치고봉인 메이저리그에서 선발 투수로 활약했으며 노히트 노런까지 이뤄냈다는 점은 확실히 많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고 새로운 시각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장애인이라는 것이 그저 대다수의 사람들과 약간 다르게 태어났을 뿐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니며, 그들도 적성이나 소질에 따라 남다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점을 심어주는데 주력할 것입니다.

 

애보트는 말합니다.
“나의 야구 생애 동안 많은 취재들이 나의 오른팔에 할애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나는 왼팔로도 아주 괜찮은 일들을 해냈다. 나는 한번도 내가 할 수 없는 것들 때문에 알려지기를 원한 적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으로 널리 이름을 떨치고 싶었고, 편견이 없는 스포츠와 야구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이제 애보트는 스포츠계가 아닌 일반 미국 사회에서도 장애인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능력을 발휘하며 직장을 구하고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도록 앞장서서 활동을 할 것입니다.   ‘장애’라는 단어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사전을 찾아봐도 다른 마음에 쏙 드는 단어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그저 약간 서로 다른 차이가 있는 많은 분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그리고 현실적으로 직업을 구하고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분위기는  우리에게도 절실한 것 같습니다.  마침 중국에서는 장애인 올림픽도 열리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땀을 흘리고 있는 우리 선수들 중에도 애보트 못지않은 스포츠 영웅들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 영웅들을 부각시키고 힘을 실어줄 수 있는 그런 대한민국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기를 기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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