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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 포먼과의 시합
부정적인 기대가 어떤 영향을 주는가의 대표적 사례는 1984년 올림픽에 출전한 매리 데커의 경우이다.
매리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여자 달리기 선수였다.
그녀는 육상 경기에서 미국의 위대한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출연한 한 텔레비전 토크 쇼에서 이렇게 되풀이 말했다.
"전 운이 따라 주질 않아요. 전 늘 운이 없어요.
운이 따라 줘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아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당연히 그녀는 큰 압박감에 시달렸다.
그녀가 습관적으로 내뱉는 부정적인 말들이 그녀의 무의식에 강한 영향을 미쳤다.
실제로 그녀는 곧 이어 벌어진 올림픽 육상 경기에서 불운의 패배를 당해야 했다.
신문 스포츠 난에 세 단어의 큼지막한 활자가 실렸다.
'난 세계 최고다!'
이것은 '캐시우스 클레이' 라고 하는 젊은 무명의 권투선수가 소니 리스톤과의 큰 시합을 앞두고
신문기자에게 한 말이었다.
신문기자는 갑자기 나타난 그 건방진 친구를 한껏 비웃는 기사를 실었다.
하지만 그가 일방적인 시합으로 승리하자 언론은 그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그는 시합에서 이겼을 뿐 아니라 그것을 예언까지 했던 것이다.
클레이는 곧 이어 세계 순회 경기를 돌면서도 "난 세계 최고다!" 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상대방을 몇 회에 쓰러뜨릴 것인지도 예언하기 시작했다.
한두 경기를 제외하고는 그의 예언은 적중했다.
훗날 무하마드 알리로 이름을 바꾼 이 선수는 과연 미래를 보는 신비한 힘을 갖고 있었던 걸까?
우리가 알지 못하던 어떤 걸 그는 이해하고 있었을까?
무하마드 알리가 갖고 있던 신비의 힘은 바로 자기 확신이었다.
알리는 결코 "난 최고의 선수다" 라든가 "난 최고에 가까운 선수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는 아주 간단하고 분명하게 "난 세계 최고다!" 라고 외치고 다녔다.
나폴레옹 힐의 다음의 말을 그는 가장 잘 증명해 보인 것이다.
"마음은 무엇을 믿든지 그 믿음 그대로 해낸다."
1942년 미국에서도 인종 차별이 심한 캔터기 주 루이스빌에서 태어났고 동네 깡패에게 맞지 않고자 권투를
시작해서 17세에 골든 글러브 챔피언이 되고 1960년 로마 올림픽에서 라이트 헤비급 금메달을 딴다.
고향으로 금의환향했지만 백인 전용 레스토랑에서 노예출신 흑인이라는 이유로 쫓겨나자 금메달도 인종 차별과
가난을 해결해주지 못한다며 금메달을 허드슨 강에 던지며 "당신들이 원하는 챔피언이 되지 않겠다" 라고 했다.
1964년 2월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고 이슬람으로 개종 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노예로 태어날 때 주인의 성을 딴 이름인 "캐시어스 클레이" 라는 이름을 버리고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했다.
이런 개명을 미국 매 보수 세력이 못마땅하게 생각해 그에게 월남 참전 징집 명령을 내렸지만 "베트남은 우리
흑인을 공격하지 않았고 아무런 원한이 없다. 흑인의 인권마저 보장해주지 않는 미국이 무엇을 위해 전쟁을
하느냐"며 징집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결국 그는 타이틀뿐만 아니라 권투 선수 면허도 정지되었다.
3년 5개월의 법정 투쟁 끝에 무죄 선고를 받았지만 그는 이미 32세 노장 선수가 되어버렸다.
주위의 은퇴 권유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그는 40연승을달리던 24세의 조지 포먼을 누르고 두 번째로 헤비급
세계 챔피언이 된다 (1974년).
이때 알리는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쏜다"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 이후 젊은 포먼과의 재대결을 앞두고 "나는 복싱보다 위대하다" 라는 말로 자신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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