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가 의무교육을 실시한다면,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의무교육을 받는 학생들에게 급식을 제공할 의무가 국가에겐 있습니다."
-마가렛 멕밀런-
19세기 영국은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발달로 그 이전 어느시기보다도 큰 번영을 이루는데 성공합니다만, 동시에 이로인한 도시빈민의 문제가
심각하게 불거져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시빈민문제에는 결식아동의 문제가 역시 예외일수는 없었지요. 런던 학교위원회(London School Board)가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1889년 12.8%의 아동들이 상시적으로 굶주리고 있고, 이들중 절반도 안되는 학생들이 학교급식을 받고 있으며, 다시 이들중 1/3의 아동만이 겨울에
주 4일동안 학교급식을 받을수 있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이러한 학생들의 결식문제는 건강악화로 이어져 결핵, 빈혈, 청각, 시각감퇴를 유발했고, 영아사망률은 50년전보다 상승했습니다.
정치가들이 가장 놀란것은 이러한 결식아동문제가 직접적으로 국력의 저하를 가져올수 있다는 사실이었죠. 보어전쟁기간동안 군자원자의 35%가 체력, 체격미달로 부적격판정을 받은 사실은 대영제국의 앞날에 커다란 공포로 다가왔습니다.-가장 극적인 경우는 멘체스터로 이 지역출신자 11000명중
8000명이 부적격판정을 받았습니다.
결국 결식아동문제는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 종요한 정치이슈중 하나로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이전까지의 결식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자체의 개선이 요구되기 시작했죠. 이전까지는 주로 결식은 주로 빈곤의 문제로 인식되었고,
빈민법에 따른 정부의 빈곤에 대한 각 가정이나 빈민구제소를 통한 구제나, 종교·자선단체 혹은 학교자체의 지원을 통해 해결되어야 할 문제라는
관점이 강했지만, 그것을 이제는 의무교육에 수반될 당연한 복지로 바라보는 관점과, 국력신장을 위한 장기적인 국가전략으로 결식아동문제해결을
바라보는 관점이 등장한것이죠.
그리고 매우 당연스럽게 이 결식아동문제를 사이에둔 관점들은 격렬히 충돌할수밖에 없었죠. 혁명은 브레드포드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브래드포드의 교육위원회의 위원이 된 독립노동당(Independent Labour Party)의 마가렛 멕밀런(Margaret McMillan)과
프레드 조웻(Frederick William Jowett)은 브레드포드학교에서 정부보조금으로 무상급식을 실시하려 하지만, 브래드포드정부는 이것이
위법임을 판결했죠. 그러나 마가렛과 프레드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방정부차원의 투쟁이 실패하자 1906년 총선에서 프레드는 브래드포드에 출마해, 하원에 진출하여 랭커스터의 노동당 하원의원이자,
목공과 목수 공동체(Amalgamated Society of Carpenters and Joiners)의 회장이었던 윌리엄 T.윌슨(William T. Wilson)등, 다른 26명의
노동당의원들과 함께 의회에 새로운 교육법을 제출, 통과시킵니다. 이법에 따르면 학교급식은 빈민구제 부문이 아닌, 교육부 담당이 되어,
학교급식에 공적자금이 투입될 법적 근거를 마련한거였죠. 그리고 이것은 영국의 복지국가화를 원하는 이들에게는 위대한 승리이자,
복지국가를 향한 의미깊은 발자국이었죠.
하지만 이것이 곧 전면적인 급식의 확대로 이루어지진 않았습니다. 이어서 학생들의 영양을 위해 우유급식을 실시하고 여기에 정부가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이 통과되기도 했지만, 어디까지나 학교급식은 빈곤층 결식아동들을 위한 제한적인 복지로 받아들여져서 1912년에는 전체의 10%미만,
1938년에는 불과 4%-그중에서 2/3만이 무상으로-만이 학교급식을 제공받을수 있었죠.
이러한 영국의 급식상황을 그 기조부터 바꾼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전쟁, 2차세계대전이었습니다.
전쟁의 와중이던 1941년 10월, 전시내각의 식품장관인 울턴 경(Lord Woolton)은 다음과 같이 선언 합니다.
"나는 우리의 아이들이 자라나 이튼과 해로우에 진학할수 있을만큼, 잘 먹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전쟁에서 우리의 식량전선을 잘 조직하여...우리 국민의 체력과 건강을 유지하고 더나아가 발전시켜야 합니다."
사실 이 시기 영국의 아이들은 도심지역의 폭격을 피해 부모들과 해어져 피난해 있던 경우가 많았던 만큼, 영양관리가 필수적이었죠.
울턴의 선언은 이어 정책적 바탕이 되어 지방정부의 학교급식지원은 늘어갔고 1944년에는 교육위원회 위원장 R.A.버틀러(Richard Austen Butler)가
지방정부들의 학교급식제공과 하루 1/3파인트의 우유의 무료제공을 법제화시킵니다.
이에 따라 학교급식을 제공받는 아동들은 1945년 40%까지 상승했습니다.
또한 급식의 내용에서도 아동들의 하루 단백질 섭취량의 42%, 칼로리는 33%, 야채와 고기가 골고루 포함되며 후식으로 푸딩이 제공되도록 명시되었죠.
이러한 영국의 급식체계는 전쟁이후에도 보수-노동당간의 정권교체에 상관없이 유지되어 1944~1975년까지 제학한 학생의 70%가량이 학교급식을 제공받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파른 인플레이션으로 증가하는 급식비용이 국가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1968년 노동당정부는 중학교 이상의 학급에서
무료 우유급식을 취소시켰고, 1971년 보수당 정부의 교육부장관 마가렛 대처는 초등학교에서 7살 이상의 아동에 대한 급식의 중앙정부 지원을
그만둡니다. 이어 1975년 보수당정부는 '학생들의 영양상태가 일반적으로 좋은 편이다'라는 내용의 영양보고서가 올라오자, 1980년 지방정부의
급식지원을 옵션화시키고, 유무상급식의 질에 대한 모든 중앙정부의 기준을 철폐하고 이것을 지방정부의 관할로 넘깁니다.
대처의 정책은 노동당은 물론, 보수당내부에서도 반발을 일으켰죠. 학교급식은 어느 한 정당이 아닌 양당 모두의 공감대와 노력으로 만들어진
정책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많았으니까요. 여기에 더글라스 블랙(Sir Douglas Black)은 1980년 그의 건강 불균형에 대한 보고서에서 결식아동들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고, 학교급식과 우유급식에 대한 지원이 사라지면 더 증가될수 있다는 경고를 하지만, 결국 무시되고 말았죠.
2004년 기준으로 오늘날 영국에서는 40%가량이 학교급식을 제공받고 있고 이중 14%가량이 무료급식입니다. 그리고 이마저도 버틀러의
1944년법안이 제시한 기준이 완전히 무너진 까닭에 형편없는 수준의 급식이 아까운 세금 날려먹으며, 학생들에게 제공되는 경우도 적지 않죠.
오늘날 영국에서는 학교급식에 대한 재인식과 이에 관련한 시민운동들이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한세기 이전과 다른게 있다면
이제 급식의 초점은 영양부족이 아닌 영양불균형에 있다는거죠. 최근의 조사에 따르면 60%가량의 학생들이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는데,
그 도시락을 싸주는 부모의 70%가량이 아이들에게 어떤 식단이 좋은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합니다. 게다가 점심식사를 패스트푸드로 때우는
학생들도 적지 않죠. 따라서 현재 영국에서 학교급식을 추진하는 운동들은 "신뢰할수 있는 친환경적인 재료에 전문 영양사에 의해 식단이 짜이고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 학교급식을 목표로 하고 있죠. 현 노동당 정부도 이런 기대에 맞춰, 학교급식에서 가공식품의 사용을 제한하고,
그날의 급식 식단을 부모들이 확인할수 있게, 트위터에 게시하도록 하는등의 정책을 피고 있습니다. 아마 다가오는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승리한다면
이러한 정책들이 더욱 촉진될수 있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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