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형벌의 종류 1.묵형(墨刑) 묵형은 이마나 얼굴에다 문신을 새기는 형벌이다. 연산조에는 건물을 중수하다 도망친 인부들이나, 도망친 노비에게 묵형을 내렸다. 또 중국에서도 이 형벌이 있었는데, 두가지 공통점은 죄를 지은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이고, 문신을 할때 죄목을 새겨 물신을 하도록 했다. 초한지에도 이 형벌을 받은 영포장군이 있다. 젊었을때 죄를 지어 묵형을 받은 것이 남아있어 경포라고도 부른다. 무예가 뛰어난 맹장이다. 이 묵형은 21대 영조때까지 계속되다가 영조대에 이르러 없어지게 되었다. 2.태형(笞刑) 태형은 도둑, 절도등 비교적 가벼운죄를 지은 범인들에게 내리는 벌인데, 죄인의 볼기를 치는 것이다. 죄의 경중에 따라 치는 댓수가 달라졌다. 태형은 보통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등 5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다. 3.장형(杖刑) 장형은 태형보다는 심한 죄를 지은 범인에게 내리는 벌이다. 때문에 태형보다 볼기를 치는 댓수가 많다. 장형은 보통 60대, 70대, 80대, 90대, 100대등 5가지 등급으로 나누었다. 4.도형(徒刑) 도형은 태형이나 장형보다 더 무거운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려지는 벌이다. 죄인을 관아에 가두고 일을 시켜서 죄값을 치르게 하는 벌이다. 죄인은 관아에서 소금을 굽거나 쇠를 달구는 등의 노동을 해야 했다. 노동을 하는 기간은 죄의 정도에 따라 1년, 1년 반, 2년, 2년 반, 3년, 3년 등으로 나누어 진다. 도형에 처해지는 죄인은 장형도 함께 받아야 했다. 5.유형(流刑) 유형은 큰 죄를 지은 사람에게 내리는 벌로 사형보다 두 단계 낮은 벌이다. 아주 무거운 벌이라고 할 수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먼 지방으로 귀양보내는 형벌이다. 죄인은 가족과 떨어져 먼 지방으로 귀양을 가야 했는데 죄의 정도에 따라 2천리, 2천 5백리, 3천리 등의 세 등급으로 나누었다. 유형 역시 장형을 함께 받아야 했다. 유형과 장형을 함께 받는 사람은 대부분 100대라 장형을 하다 죽는 경우도 있었다 한다. 귀양 또는 유배라고도 한다. 유형의 일종으로 속거천리(速去千里)도 있는데 천리 밖으로 가란 뜻이다. 귀양을 간 사람중에 대부분은 병사하거나 사약을 받아 죽었다. 6.위리안치 위리안치는 귀양을 보내 집 주위에 높은 담이나 철조망을 쌓아 그곳에서 평생동안 있게 하는 형벌이다.
7.사형(死刑) 참수형은 저잣거리나 형장에서 망나니가 목을 베는 것이고, 효수는 목을 베어 길가에 걸어 놓는 것이고, 사약은 독약을 죄인에게 주어 죄인이 죽게 하는 형벌이고, 삼족멸은 삼족(외가,친가,형제)에게 다 사형을 내리는 것이고, 구족멸은 구족(외가,친가,형제,친척,사촌,육촌,팔촌등)에게 다 사형을 내리는 것이고, 사지찢기는 소나 말의 꼬리에 줄을 달아 사형하는 사람의 사지에 줄을 달고 말과 소를 달리게 하면 사지가 찢겨진다. 이것이 사지찢기 인데, 사지찢기는 형벌중에 가장 참혹하고 무서운 형벌이다. 8) 속전(贖錢) 조선에서는 특별히 정한 범죄를 제외하고는 형 대신 금전으로 납부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속전제도였다. 속전은 오늘날 벌금과도 유사하다. 그렇지만 벌금은 재산형인데 비해 속전은 신체형(태 장), 자유형(도 유), 생명형을 선고받은 후 본형을 재산형으로 대신한다는 점에서 구별된다. 그러나 모든 형벌을 대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속전할 수 있는 요건을 법률로 정해 놓았다. 속전제도에는 조선시대의 신분에 의한 차별, 유교국가적 통치이념이 잘 드러나고 있다. 속전의 유형은 크게 신분에 의한 것, 특수직업에 대한 것, 부녀 노약자 병자에 대한 것, 상을 당했을 경우나 부모의 봉양에 관계된 것, 그리고 휼형으로서의 속전 등으로 구분되었다. 속전은 형의 집행기관에서 징수하게 되는데 중앙은 형조, 한성부, 사헌부에서 담당하였고, 지방은 각 아문의 수령이 담당하였다. 징수된 속전은 호조로 이송하여 국가재정에 충당하기도 하였으나 관아에 소속된 관리들의 급료와 건물유지비 등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런데 속전의 징수를 둘러싸고 관리들의 부정이 많게 되어 역대 왕들은 이의 시정을 위해 단속을 폈지만 근절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여진다. 그리하여 영조 때는 속전에 관한 사무를 전담시켜 공정한 관리를 하기 위하여 보민사라는 기관을 설치하였다. 보민사는 10년동안(영조 40-50년) 존속하면서 중앙의 각 기관의 속전징수에 관한 업무를 통합하여 시행하였으나 영조 50년(1774년) 다시 동기관을 폐지하고 형조에 이 업무를 귀속시켰다.
9) 부가형 조선의 형벌에는 기본형인 5형 이외에도 여러종류의 부가형이 있었다. 그 중 중요한 것은 자자(刺字), 노비몰수, 재산몰수, 피해배상 등을 들 수가 있으며 연좌제도도 일종의 부가형의 성질을 띠고 있다. 자자형은 신체의 어느 부위에 먹물로 글씨를 새겨 넣는 형벌인데 주로 도적으로서 장 도 유형에 처하여진 자에게 부과되었다. 대명률직해의 규정에 의하여 팔목과 팔꿈치 사이에 매자를 각 1촌 5분의 네모안에 매획의 넓이를 1분 5리로 하여 글자를 새겨 넣었다. 자자형을 부과하는 목적은 전과자임을 알려 수치심을 갖게 하는 동시에 요시찰로 관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팔뚝에 자자를 하게 되면 외관상 바로 문신이 드러나지 않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는 이유에서 얼굴에 자자하는 제도가 생겼는데 이를 경면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경면형은 도둑의 창궐을 막기 위한 방편으로 사용하였으나 실제 시행된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 20년 실록에 의하면 "경면형으로 다스려진 죄인은 다만 2명 뿐이다"라고 적혀 있다. 자자형은 평생동안 전과자라는 낙인을 찍고 살아야 하는 가혹한 처벌이었기 때문에 그 시행에 신중을 기하였다. 영조 16년(1740년)에 이르러 자자의 도구를 소각시키고 다시 사용치 못하도록 전국에 엄명을 내림으로써 완전히 폐지하였다. 10) 法外의 예 조선시대 형벌 중에는 법에 규정된 형 이외에 행하여지던 몇 개 종류의 형이 있는데 법 이외의 형이라도 실제 관에서 관습적으로 시행함으로써 일반화되어 있던 것과 권세가 있는 사가에서 불법으로 행하여지던 것 등이 있다. 주리, 태배, 압슬, 난장, 낙형 등은 전자에 속하고 의비, 월형, 비공입회수, 고족 등은 후자에 속한다. 주리형은 사람의 양다리를 함께 결박하여 그 중간에 2개의 주장을 넣어 가위 벌리듯이 좌우로 벌리게 하는 것으로 일종의 고문방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모반 등의 중대사건에서 행해졌고 일반의 경우는 포도청에서 도적을 다스릴 때 사용되었다. 주리형을 받게 되면 죄를 면하고 풀려난다고 하여도 불구가 되기 쉬운 참혹한 형벌이었으므로 이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였다. 태배형은 태로써 등을 난타하는 형벌인데 고문의 방법으로 사용되었고 이형은 목숨을 잃기 쉬운 형이었으므로 세종 임금 때에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압슬형은 무릎 위에 압력을 가하는 고문의 일종인데 언제부터 이 형벌이 존재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조선초기에 본형에 대한 기록이 있다. 실록에 의하면 태종 17년 죄인을 신문함에 있어 "압슬형을 시행할 때 1차 시행에는 2명이, 2차 시행에는 4명이, 3차 시행에는 6명이 하는데 그 범죄가 10악, 강도살인과 같은 중죄가 아니면 압슬형을 시행하지 못한다"고 하였다(조선왕조실록 태종 17년 5월 11일). 본형은 현종 6년(1665년) 왕명으로 금지하였고 영조 1년(1725년) 다시 압슬형을 영구히 없애라는 영을 내렸다. 난장은 여러명이 장으로 신체의 어느 부분도 가리지 않고 난타하는 형벌로서 주로 고문의 일종으로 사용된 것 같으나 자칫하면 목숨을 잃게 하는 위험한 형벌이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 주장당문형(朱杖撞問刑)이 있는데 이는 죄수를 가운데 두고 여럿이 죄수의 주위를 돌면서 때리는 형벌이다. 이때 사용하는 장이 붉은 색이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중종 6년(1511년) "난장의 형은 국법이 아니므로 이를 금한다"라는 하교가 있었고(증보문헌비고 권제 134 형고휼형) 영조 46년 다시 주장당문을 없애라는 하교를 내려(대전통편, 대전회통 형전 추단안) 이를 금지시켰다. 그러나 상천민으로서 신분이 높은 여자를 범하였거나 근친상간 등의 반윤리적 죄를 범한 자를 멍석으로 싸서 여럿이 몽둥이로 난타하는 사벌로서의 난장이 민간의 오랜 관습으로 존재하였다고 한다. 낙형은 쇠를 불어 달구어 몸을 지지는 형벌이다. 대적죄인의 신문에 사용되었다고 하며 권문사가에서는 노비의 죄를 벌 할 때 행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때 이를 금하는 영을 내렸다. 그러나 숙종 때 강도익명서의 옥서에서 낙형을 행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따라서 영조 9년(1733년)에 다시 왕명을 내려 낙형을 폐지하였다(속대전, 대전통편 형전 추단안). 의비형은 코를 베어버리는 형벌로서 권세가 있는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릴 때 자행한 경우가 있었다. 세종 임금이 이를 엄중히 금하는 영을 내린 후(대전통편 형전 추단안) 역대 왕은 본 형을 불법행위로 엄히 단속하였다. 단근형은 죄인의 힘줄을 끊어버리는 형벌로서 도적이 성할 때 이를 근절하기 위하여 임시조치로 시행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세종 26년 황희의 건의로 단근형을 폐지하기로 한 사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형은 이미 오래 전부터 존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단근형은 중종 5년 영의정 김수동의 건의로 영구히 이를 폐지하는 영을 내렸다(서일교, 조선형사제도의 연구, 1974 : 173). 월족형은 단근형의 일종으로 발뒤꿈치의 힘줄을 베어버리는 형인데 월족형을 하게 되면 절음발이 또는 앉은뱅이가 되는 매우 잔인한 형벌이다. 이 역시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릴 때 자행하는 경우가 있어서 세종임금이 영을 내려 법으로 이를 금하였다(대전회통 형전 추단안). 그러나 패륜행위를 하는 자에게 문중 혹은 마을 사람들이 사벌로서 행하는 풍습이 존재하였다고 전한다. 비공입회수(鼻孔入灰水)는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코에 잿물을 붓는 일종의 고문방법인데 권세가 있는 사가에서 노비나 천민의 죄를 다스릴 때 사용된 경우가 있었다고 하나 이 역시 불법적인 것이었으므로 형전사목에서 남형의 사례로서 특별히 금지하는 영을 내린 바 있다. 고족형은 발을 쪼개는 형벌인데 사가에서 노비의 죄를 다스리면서 자행하는 경우가 있었으나 형전사목에서 이를 금하는 영을 내렸다. 그 외 물에 삶아 죽이는 형벌이라는 어의를 지닌 팽형(烹刑)이라는 형벌이 있었다. 구체적인 규정은 없으나 특별히 서정쇄신에 관한 죄를 범하여 나라의 재물이나 백성의 재물을 탐한 관리를 이 형에 처했다는 사료가 있다. 구한말 일제 통감부의 감옥관리로 와서 후에 경성형무소장을 역임했던 중교정길은 팽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中橋政吉, 朝鮮舊時의 刑政, 治刑協會, 1937 : 202-203). 임시로 종로의 사람 많은 다리 위에 커다란 아궁이를 크게 구축하고 그 곳에 큰 가마솥을 건다. 그리고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있게끔, 나무를 지피어 놓는다. 이 아궁이 앞에 병풍을 치고 군막을 둘러 재판석을 만든다. 이 재판석에는 입회하는 포도대장이 앉는 좌석이 마련된다. 이와 같이 준비가 갖추어지면 포도대장이 엄숙히 나와 앉고 죄인이 대명한다. 죄인은 가마솥의 나무뚜껑 위에 묶인 채 앉힌다. 이 죄인에게 포도대장은 엄숙하게 죄명을 선고하고 처형을 하명한다. 대개 이 형의 집행은 포도대장의 판결선고가 끝나면 그것으로 형이 끝난 것으로 간주되나 때로는 그 가마솥에 미지근한 물을 담가 그 속에다 죄인을 처박기도 한다. 또는 그 빈 솥에 죄인을 몰아넣고 솥뚜껑을 닫은 다음 아궁이에 불을 때는 시늉만 하고 그치는 경우도 있다. 이 팽형집행의 차이가 독직관원의 죄질에 따라 달라진 것인지 편의상 그렇게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이 형집행으로 미루어 보아 형을 집행한다기보다 공중이 널리 보는 가운데서 베풀어지는 면박의 한 요식같은 인상을 받았다. 하지만 이 팽형을 받은 사람은 비록 생명은 유지되었을 망정 마치 사형당한 사람처럼 여생을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일단, 이 팽형의 행형이 끝나면 물에 젖은 죄인은 가마솥에서 끌어내서 죄인의 가족에게 인도된다. 인도될 때 이 죄인이 산사람처럼 행동했다가는 안된다. 마치 뜨거운 물에 삶아진 시체처럼 행세해야 한다. 인도받은 가족들도 호곡을 하며 마치 죽은 가장을 대하듯이 슬퍼해야 하고 또 상례에 준하여 인도받아야 한다. 이 살아 있는 시체를 집으로 운반할 때고 대성통곡을 하며 뒤따라가야 한다. 일단 집에 옮겨오면 그 살아있는 시체의 신분이나 지체에 알맞은 응분의 상례를 마치 죽은 사람과 똑같은 절차대로 치러야 한다. 이 상례가 끝나면 이 독직죄인은 공민권을 박탈당하고, 공식적으로는 그의 친지나 친척과도 만나서는 안되게끔 되어있다. 오로지 집안에 갇혀 가족하고만 살아야 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실제로 산 사람을 삶아 죽였는지 또는 삶는 시늉만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이 팽형은 구한말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3. 조선시대의 감옥 4. 조선시대 형벌의 특징 조선사회의 특징은 유교중심의 관료적 중앙집권적 봉건사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유고는 조선왕조에 있어서 국가의 지도이념으로서 정치 사회 교육의 원리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 시대에 확립된 모든 제도와 정책은 이 유교사상의 영향하에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조선사회의 특성으로 말미암아 형정에 있어서도 그 원리에 있어서는 고려시대의 것을 모방하면서 더욱 강화 발전시킨 것으로 이해된다. 조선사회의 전통적 법관념은 그것이 따로 떨어진 완결된 법개념이라기 보다는 사회전체적 규범문화의 일부이며, 그 규범문화는 당시의 압도적인 정신적 분위기였던 성리학에 의해 채색되어진 것이다(최종고, 1989 : 82). 성리학은 처음부터 상하, 존비, 귀천의 계급적 인간관계를 전제로 하는 사상체계이다. 각 사람은 자기의 명분에 따라 자기가 속한 계층에 합당한 지위를 지키는 것이 正名이다. 성리학은 인간사회를 이와 같은 정명에 입각하여 계급제도를 확립하는 데에서 가족, 국가, 세계의 질서가 이루어진다고 본다. 이와 같은 정신적 사회적 위계질서를 수행하는 데에 法과 刑은 필수수단으로 여겨졌다. 법형의 사용에는 "벽이지벽"이니 "형기우무형"이니 하는 극도의 신형주의를 법집행자들은 표방하였지만 그들이 목적하는 예의지국, 도의국가에 대한 동경이 큰 만큼 법과 형벌은 배제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윤리적 표준에 의하여 십악이니 강상죄니 하는 범죄범주를 만들고 그에 맞추어 형벌이라는 강제를 장치하여 놓았다. 그 집행과정에서 역설적으로 형벌을 가혹하게 남용하는 결과가 되었다. 그것은 국가의 윤리적 성취동기가 강할 때 더욱 그러했다. 조선조의 형법집행이 가혹했던 것은 계속적인 중앙집권화의 정치적 요청이 작용했던 면도 무시할 수 없고, 또 그 정치성, 윤리성의 고려에서 사면과 감형이 빈번하게 실시되었다. 이것은 어쨌든 조선조의 법이 윤리, 도덕의 이상과 항상 역동적으로 연결되고 있었다는 점을 말해주는 부분이다. 한편으로 법의 윤리화를 계속해 나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법의 자율화 내지 독립발전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겠다.
2.한번에 30대 이상 치지 않는다. 3.하루에 한 차례 이상은 심문하지 못하며, 한 번 심문을 하면 3일 이내에 다시 심문을 할 수 없다. 4.죽을 위험이 있는 죄인에게는 형벌을 중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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