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로운 탄한(坦漢;백정)의 딸
조선 성종 때 어느 한 재상이 평안감사가 되어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였다.
그 아들은 이때 나이 15-16세로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
태어날때부터 자태가 빼어나고 천성이 학문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경치를 구경하러 문 밖을 나가본 적도 없고 여자로 인하여 마음을 동해본 적도 없었다.
이렇게 순진하던 도령이 하루는 봄날씨 화창하고 경치가 아름답자 지인(知印:通引) 한 명을 거느리고 걸어서
성 밖을 나갔다. 강물을 따라 유람하다가 갑자기 빨래하는 처녀를 보게 되었다.
▲ 김홍도의 빨래터
나이는 17-18세쯤 되고 용모가 아름다운 것이 과연 속세의 범상한 미인이 아니었다.
첫눈에 반하여 반나절이나 주목하고 있었는데 처녀는 보고도 못본 체 하였다.
도령은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려서 뒤를 밟아갔지만 처녀는 한 번 들어간 뒤로 다시는 나오지 아니하였다.
그러자 도령이 지인을 시켜서 문을 두드리게 하였더니, 조금 후에 봉두난발(蓬頭亂髮)을 한 사내 하나가
안에서 나와 말했다.
“도령은 뉘시오?”
“사또의 자제이시다.”
그 사내는 땅에 엎드려 절을 하고 꿇어 앉아서 말했다.
“사또의 자제께서 웬 일로 행차를 하셨습니까?
소인은 탄한 김가이온데 황송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방금 빨래해가지고 안으로 들어간 처녀는 누군가?”
“그애는 바로 소인의 여식으로 이름이 영랑(英娘)입죠.
그애는 타고난 성품이 보통 아이들과 다르고 나이가 이미 혼인할 때가 되었으나 출가하려 들지 않습니다요.
출신은 지극히 천하지만 또한 문 밖을 나가려 하지 않았사온데 오늘따라 빨래한다고 핑계대며 고집을 부리고 나가더니 도련님 눈에 띄어서는 안될 무슨 일이라도 저질렀는지요?”
“그게 아닐세. 내가 자네 딸을 보니 연정을 견딜 수가 없네.
장가들어 첩을 삼고 싶은데 자네 의향은 어떠한가?”
“어찌 그같은 말씀을 하십니까요? 그러나 그애가 고집이 세니, 들어가 의논해보고 나와서 말씀드립죠.”
탄한이 안으로 달려들어갔는데 그들 부녀가 상의하는 말을 역력히 들을 수 있었다.
“사또의 자제가 너를 맞아 첩으로 삼겠다 하니, 어찌 영광이 아니겠니?”
“저는 출신은 비록 천하나 뜻만은 천하지 않아요.
일찍이 들으니 '남자가 혼례를 갖춰 맞이해서 가지 않고 여자가 스스로 달려가면 첩이 된다.'하데요.
소녀는 음분(淫奔)하지 않았는데 어찌 첩으로 삼으려 하나요?”
탄한이 나와서 말했다.
“딸아이의 성품이 몹시 괴팍하므로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이 죄 만 번 죽어 마땅하오나 노여움을 거두어 주소서.”
도령은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끝내 미련을 버리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한참 동안 곰곰이 생각하다가 말했다.
“좌우간 한 번 만나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탄한은 도령과 함께 안으로 들어가서 서로 만나보았다.
만나보니 더욱 마음을 진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령이 말을 꺼냈다.
“네가 내 첩이 되면 영광스럽지 않겠니?”
“대개 인생의 처지는 마치 바람에 날리는 꽃이 어느 쪽에 떨어지느냐에 따라 더러운 자리가 비단방석이 되기도 하고
비단방석이 더러운 자리가 되기도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의 귀천이 어찌 일정하게 정해져 있는 것이겠습니까?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니, 재덕(才德)이 우선이고 문벌(門閥)은 뒤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재덕과 문벌을 겸전할 수 없다면 재덕을 논하는 것이 마땅하고 문벌을 비교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으니 깊이 생각하옵소서.”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장가드는데 어떻게 예를 갖추겠느냐?”
“혼서(婚書) 한 장이면 족합니다.”
그래서 드디어 그날 밤에 몰래 혼인을 하게 되었다.
혼인이 이루어지고 나자 도령은 걱정을 하였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꼬!”
“걱정하실 필요도 없고 두 번 오실 필요도 없습니다.
좌우간 가셔서 기다리면 필시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그 이튿날 밤이 깊어 인적이 고요할 때 감사의 대부인(모친)과 부인은 내아에서 아직 자지 않고 있었다.
이때 곱게 생긴 한 미인이 밖에서 들어와서 말했다.
“소녀는 가까운 고을에 사는데 우연히 친척집에 왔다가 영문(營門)의 위의(威儀)를 보기 위하여 감히 와서 배알하옵니다.”
두 부인은 그녀의 자색과 행동거지를 한 번 보고 문득 그녀를 놓칠 마음이 없어졌다.
“객지라면 나갈 필요없이 며칠 머물다 가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녀는 처음부터 굳이 사양하지 않고 조용히 자리에 앉았는데 언어가 유식하고 동작이 법도에 맞았다.
그 이튿날 아침 감사 부자가 안으로 들어왔으나 또한 몸을 피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행동하였다.
감사가 놀라며 물었다.
“이는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으나 우연히 들어왔기에 내가 매우 사랑하여 유숙하게 하였는데 비단 용모가 극히 아름다울 뿐 아니라 또한 범절이 출중하니, 필시 예법가의 부녀자인 듯 싶다.”
대부인의 말에 이어 감사가 말했다.
“제가 부녀의 의리를 맺고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대부인은 크게 기뻐하며 예절로써 서로 보게 하였다.
이로부터 음식과 의복 등을 일체 그녀에게 맡기니, 모든 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없었다.
하루는 감사가 관아에서 물러나 안에 들어왔는데 근심하는 기색이 있었다. 대부인이 물었다.
“무슨 걱정거리가 있는가?”
“오늘 공사(公事)가 매우 괴이하였습니다.
향족(鄕族) 양가가 혼인을 맺은 지 오래되었는데 처녀가 혼약을 후회하며 소장을 올리기까지 하므로
처녀의 아비를 잡아 가두었는데, 오늘 처녀가 수탉을 가지고 와서 바치고 갔으니 처결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래서 걱정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의녀(義女)는 용모를 단정히 하고 앞으로 나와서 말했다.
“그 신랑을 데려와서 지인배를 시켜 그 하체(下體)를 조사해 보게 하옵시면 자연 처결할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가 밖으로 나와서 그녀의 말처럼 하였는데 과연 생식기가 없었다.
그래서 처녀의 아비를 놓아보내고, 안으로 들어와서 의녀에게 물었다.
“너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일찍이 들으니 수탉은 무엇이 없다고 하더군요. 그 처녀는 이인(異人)입니다.
낭군이 그와 같음을 알고서도 감히 분명하게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들으매 본관(本官:平壤庶尹)사또에게 아들이 있다 하는데 어찌 그 처녀와 성혼하도록 권하지 않으십니까?”
본관사또는 감사의 말을 듣자 문벌에 구애하지 않고 드디어 성혼을 하였는데, 그 처녀는 과연 뛰어나게 기이한 여자였다.
감사가 후회하며 물었다.
“어찌 내 아들과 성혼시키려고 하지 않았느냐?”
“자제의 좋은 배필감이 어찌 없겠습니까?”
얼마 후에 감사의 친구 송생(宋生)이란 이가 강계(江界)에 도망가 사는 종들을 찾으러 가는 길에 감영에 들렀기에
음식을 잘 대접하였다. 송생은 여러 날 머물다 떠나면서 약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다시 들림세.”
송생이 강계에 가니, 종들은 다 부유하고 족속도 많았다.
그중에 교활한 놈들이 서로 모의하였다.
“첫째는 다른 지방으로 자취를 감춘 우리들의 이름이 탄로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고,
둘째는 매년 속전(贖錢)을 거두되 한없이 요구한다면 계속 대기가 어려울 것이니,
일찌감치 죽여버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송생을 암실에 가두고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그러자 송생이 말했다.
“나는 이 지방 감사와 친구간인데 여기에 올 때 들러 보고 '돌아갈 때 다시 찾아보겠다.'고 하였으니
너희가 만일 나를 죽인다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교활한 종이 또 모의를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죽일 수가 없으니, 우선 '속전을 거두어 곧장 집으로 가겠다.'는 뜻으로 감사에게 편지를 써서 보내게하여
한편으로 친소관계를 탐지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후환을 없앤 다음에 살해하는 것이 옳겠다.”
그래서 드디어 글 잘하는 사람 몇 명을 데려와서 송생의 면전에 앉히고서 '특별히 후대를 받고 또 많은 속전을 받아서
지금 가지고 직행하려 하니, 찾아 볼 수 없겠네.
속히 답서를 주게나.'라는 뜻을 편지를 쓰도록 협박하므로 송생은 어찌할 도리가 없어 다만 그들의 말에 따라 편지를 썼다.
편지가 완성되자 종들은 발빠른 놈에게 들려 보냈다.
감사는 편지를 받아보고 처음에는 몹시 기뻐하다가 나중에는 더욱 의심을 가지고 안에 들어가 의논했다.
“송생이 속전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기쁜 일이나 돌아오는 길에 직행하겠다는 것은 의심스러운 일이다.”
의녀가 말했다.
“송생의 편지를 한 번 보았으면 합니다.”
감사가 그 편지를 건네주자, 의녀가 편지를 받아 이리저리 내용을 뜯어보니 점점 의심이 갔다.
연월일 밑에 '송흠배(宋欽拜)'라고 쓰여진 것을 발견한 의녀가 물었다.
“송생의 이름이 흠(欽)자입니까?”
“아니다.”
“답서를 보냈습니까?”
“아직 안 보냈다.”
“답서가 만일 간다면 송생은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감사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느냐?”
“옛날 송(宋)나라 흠종(欽宗)이 금(金)나라에 갇힌 것처럼 지금 송생도 감금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를 쓸 때에 드러나게 쓸 수 없어서 다만 은어(隱語)를 가지고 구원이 있기를 바란 것입니다.”
감사는 마치 술이 깨듯 꿈이 깨듯 정신을 차리고, 급히 감영의 구졸들을 풀어 보내 주모자 몇 명을 잡아다
법으로 다스리고 송생을 탈없이 데려 왔다.
감사는 더욱 탄복하여 말했다.
“어떤 사람이 이같은 딸을 낳았을까.”
감사의 아들은 버젓이 그녀와 함께 한 집에 거처하면서도 드러내 놓고 혼사를 성취할 수 없어
결국 숨은 근심 때문에 병이 나서 식음을 전폐하고 얼굴이 초췌하여 갔다.
대부인이 밤낮으로 간호하며 약을 권했지만 물리치고 먹지 않으며 말했다.
“이 병은 약으로 다스릴 수 있는 병이 아니니,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대부인은 걱정을 견디지 못하여 백방으로 타일렀다.
“너의 병 원인을 너는 반드시 알 것이니 제발 말을 좀 해보아라. 내가 너를 위해서 해결해주마.”
“저 의녀는 바로 이 손자의 처입니다. 알리지 않고 장가를 들었으니 그 죄 만 번 죽어 마땅합니다.
그래서 병이 난 것입니다.”
손자가 사실을 털어놓자 대부인이 물었다.
“문벌이 어떠하냐?”
“매우 천한 사람입니다.”
“향족(鄕族)이냐?”
“아닙니다.”
“상사람이냐?”
“아닙니다.”
“관속(官屬)이냐, 기생족속이냐, 무당집이냐?”
“다 아닙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이냐?”
“탄한(坦漢:백정)입니다.”
대부인은 말했다.
“매우 난처하기는 하나 사람됨이 범절이 월등히 뛰어났다.
네 아버지도 애지중지 하니, 반드시 문벌을 가지고 구애하지 않으실 것이다.
비록 구애하려 한다 해도 내가 있으니, 감히 내 뜻을 어기겠느냐? 걱정하지 말고 병이나 나아라.”
대부인과 부인은 그녀가 손부와 자부가 됨을 알고 평소보다 배다 사랑하였다.
하루는 감사가 안으로 들어와서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여 의녀에게 은밀히 물었다.
“밀부(密符)를 잃었으니 어쩌면 되겠느냐?”
“들으니 중군(中軍)과 매우 사이가 안 좋
다 하시는데 사실입니까?”
“그렇다. 나도 중군의 짓이라 의심하나 장차 어떤 방법으로 찾아내야 할지?”
“오늘밤은 달이 유난히 밝으니, 본관과 중군을 청하여 연광정(練光亭)에서 잔치를 베푸세요.
띠를 풀어놓고 유쾌하게 마실 때에 반드시 객사(客舍)에 불이 날 것이니, 급히 밀병부(密兵符)가 달려 있던 띠를
중군에게 맡겨놓은 연후에 객사로 나가시면 불은 반드시 진화될 것입니다.
감영에 돌아오신 뒤에 서서히 군례(軍禮)를 가지고 밀부의 띠를 바치게 하시면 저절로 찾아질 것입니다.”
감사는 크게 기뻐하고 그녀의 말대로 시행하였다. 군례로 와서 바치는 자리에서 감사가 말했다.
“띠를 맡길 때에는 일이 워낙 급해서 점검할 겨를이 없었으나 받을 때에는 일이 신중하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살펴보니, 밀병부가 뚜렷이 달려져 있었다. 감사는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안에 들어와서 이야기했다.
“만일 저같은 자부를 얻는다면 원도 없겠다.”
대부인이 시기를 타서 웃으며 말했다.
“벌써 네 자부가 되었는데 너는 다시 무엇을 한탄하느냐?”
감사가 깜짝 놀라 물었다. 대부인이 그 사실을 자세히 얘기하자 감사는 기뻐하였다.
“이같은 며느리를 두었는데 어찌 문벌을 논하겠습니까?”
그리고 곧 택일하여 잔치를 베풀었으며 비로소 신부의 예로써 보았다.
그리고 상소하여 이 사실을 자세히 아뢰자,
임금은 비답을 내려 탄한을 면천시켜 벼슬을 제수하였다.
이후의 기계묘산(奇計妙算)은 이루 기록할 수 없다.
《양은천미(揚隱闡微)》, 編著者 未詳, 檀國大所藏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