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가 힘겨운 발걸음으로 당신들이 묻힐 곳을 찾아 오르신다
시제를 먼저 마치고 작은 아버지가 "어디로 갈까요 형님" 하시자 "엄마한테 가자" 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가슴이 갑자기
짠해짐을 느꼈다 그렇게 말씀하시고 할머니가 계신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 두 분은 말을 아끼셨다
아마도 찾아가는 시간 동안 아버지는 기억속의 '엄마'를 생각하며 마음이 설레셨으리라
선산을 오르시는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뒤에서 바라보자니 마음 한 구석이 싸해지면서 쓸쓸해지는 기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올 초 아버지 형제들의 묘를 할머니가 계신 곁에 함께 하기로 결정을 보시고 선산의 터를 닦는 공사가 한창이다
아직 떼도 입히기 전이고 진입로 또한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황이라 노구의 몸이 더 힘들어 보인다
형제분 중 위의 두 분이 먼저 돌아가셨기에 살아계신 형제분 중 제일 큰 형이 되시는 아버지가 제일 윗자리가 되셨다
웃음진 얼굴로 당신이 묻힐 곳이 이 자리며 그 옆이 어머니의 자리라고 내게 설명해 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참으로 아이러니했다
죽어서 묻힐 곳에 억만금의 치장을 한들 무에 좋을까 싶었지만 화장은 싫다시면서 묘를 써주길 원하셨다
무릎이 안좋으신 어머니는너무 힘들다며 "당신이 이 곳에 묻혀도 오기가 힘들어서 난 안올라요" 하신다
전남 장성에서 태어나셔서 중학교 졸업도 힘든 당시에 몇 십리를 걸어다니시며 고등학교는 물론 대학까지 졸업하신 아버지는 당시 장성
에서 큰 인물로 여겨지셨다고 하신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공무원이 되기를 바라셨지만 아버지는 싫다시며 사업을 해보고 싶다하셨단다
이에 할아버지는 수고했다며 하고 싶은 일을 하라시며 아버지 몫의 논을 미리 떼어주셨다고 한다 이를 받자마자 바로 상경하여 나름의
사업을 시작하셨지만 모든 아이템이 시기가 한 발 앞선 터라 생각처럼 녹녹치 않았고 뒤이어 대연각호텔 화재를 비롯하여 몇 번의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대형사고를 맞이하면서 중년 이후로 재기의 기회를 갖지 못하셨다 성격상 남의 밑에서 일하기를 싫어하셨던지라 이후
생활의 고통은 오롯이 어머니의 몫이였고 그런 고생스런 삶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랐다
아버지의 어린 시절은 모두 작은아버지들이나 친척분들께 전해 들은 이야기로만 추측할 수 밖에 없지만 형제들에겐 꽤나 미움을 샀을거라
생각된다 농가의 자식으로 태어나 형들 뿐 아니라 동생들 모두가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는 살 수 없었음에도 아버지만이 유일하게 공부
한답시고 흙 한 번 제대로 묻히지 않으셨다고 한다 아마도 공부만이 가장 쉬운 지름길이란걸 이미 깨우치지 않았나 싶다
지금도 친척분들은 아마 당시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공무원이 되셨다면 국회의원이나 도지사도 되었을 분이라고 농을 섞으신다
내년이면 팔순이신 아버지시지만 아직도 큰 병치레 한 번 없이 정정하신 모습엔 자식으로서 그나마 다행이다 싶다
아버지 어머니 모두 남은 여생 건강한 모습을 끝까지 지켜주시길 바랄뿐이다
두 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 속으로 다시 한번 불러봤다
엄마....
아빠....
光山金氏 송백당공파의 時祭가 올려지는 곳이다
전남 장성군 서삼면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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