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0
한국 입자가속기의 대부로 포항방사광가속기 건설 주도
포스텍의 설립과 성장을 주도한 과학교육 개혁가
김호길
한국 과학기술의 도약 이끈 제도 혁신의 리더
#2.
학력
1956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이학사(물리학)
1964 영국 버밍엄대학 이학박사(원자핵물리학)
경력
1966~1978 미국 메릴랜드대학 교수
1978~1983 미국 로렌스버클리연구소 선임과학자
1983~1985 연암공업전문대학 학장
1985~1994 포항공과대학교 총장
포상
1985 국민훈장 동백장
1994 상허문화대상
1994 국민훈장 무궁화장
#3.
“우리나라에서도 노벨상이 나온다면 그 사람은 여러분 중에 한 명이어야 합니다.”
김호길 박사의 꿈은 포스텍에서 한국의 첫 노벨상 수상자가 탄생하는 것을
직접 보는 것이었다. 미완의 꿈으로 남았지만,
그가 심은 희망의 씨앗은 계속 영글어 자라고 있다.
재치와 해학이 넘치는 달변으로 사람의 마음을 휘어잡았던 호인 김호길.
그는 “획일적이고 대중적인 대학교육이 인재를 망친다”는 소신으로
세계적 물리학자 이상의 국민적 신망을 얻었던 한국 과학계의 큰 별이었다.
김 박사가 대학행정가로서 보여준 놀라운 추진력과 소신은
현재를 살아가는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있다.
#4.
김호길 박사는 1933년 유교의 본고장인 경북 안동군 임동면 지례동에서도
30리를 걸어 들어가야 했던 산촌 마을에서 8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아홉 살 무렵 부친이 세운 지례간이학교에 입학했던 그는 이듬해인 1943년 4월
지례의 집에서 120리나 떨어져 있던 도산면의 도산국민학교로 편입했다.
영특했던 그는 수학과 역사에서 특히 재능을 보였는데,
안동중학교 시절 담임교사가 서울대 물리학과 진학을 권유했을 정도였다.
#5.
교육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김 박사가 자신을 따라 교사가 되길 바랐다.
그러나 그는 부친의 엄명을 어기고 친척에게 입학금을 빌려
한국전쟁으로 인해 부산으로 이전했던 서울대 물리학과에 1952년 입학했다.
이후 그의 고학이 시작됐다. 국립중앙관상대 말단공무원과 중학교 수학강사 자리를 전전하며
한 달 중 열흘은 보리밥과 소금만 먹는 일상이 이어졌다.
그것도 떨어지면 아예 굶어야 했지만, 그는 휴학 한 번 없이 대학을 졸업하며
자신이 목표한 것은 끝까지 해내고야 마는 집념을 보여주었다.
#6.
서울대를 졸업한 후 진해 공군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직했던 김 박사는
힘들었던 교관생활에서도 이론물리학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그의 철학이 빛이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후 1959년 원자력연구소 촉탁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중성자빔 발생장치를
설계하고 건설하는 일을 책임졌던 그는 실력을 인정받아
1961년 국제원자력기구(IAEA) 연수생으로 영국 버밍엄대학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개교 이래 최단 기간인 2년 반 만에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으며,
본격적인 물리학 연구의 길에 들어선다.
#7.
1966년부터 미국 메릴랜드대학 물리학과와 전기공학과의 교수로 재직하며 핵물리학과
플라즈마물리학 등을 연구한 그는 입자가속기 연구의 전문가로 세계적 명성을 쌓아갔다.
그는 원형 궤도에서 입자를 가속하는 장치인 사이클로트론(Cyclotron) 연구에서 여러 성과를 남겼는데, 대표적으로 입자 가속을 위한 ‘킴스 코일(Kim’s coil)‘ 창안이 꼽힌다.
또한, 집단가속(Collective Acceleration) 원리를 제시하며 새로운 형태의 입자가속장치 개발에 몰두했다.
#8.
당시 로렌스버클리연구소 선임과학자로 연구에 매진하고 있던 그는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라는 학교 측의 끈질긴 요구를 외면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귀국하여 고국의 과학발전과 후진양성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9.
김 박사가 22년간의 해외체류를 끝내고 영구 귀국한 것은 1983년 럭키금성그룹
구자경 회장의 권유로 경남 진주의 연암공전 초대 학장직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정부가 4년제 대학으로 인가해 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귀국 당시의 포부는 실현할 수 없었다.
당시 김 박사가 전두환 대통령에게 이 일과 관련해 긴 상소문을 보낸 일화는 유명하다.
“정부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으니 대한민주공화국이라 하지 말고
대한사기공화국이라 해야 한다”라고 쓴 상소는 지금도 회자되고 있을 정도다.
#10.
바로 그때 박태준 포항제철 회장이 그에게 연락을 해왔다.
포항공과대학교(지금의 포스텍)의 초대 학장을 맡아달라는 전갈이었다.
타이밍조차 운명적이었다.
당시 박태준 회장은 철로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을 통해 국가에 보탬이 되어야 한다는 결심을 실천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러나 초대 학장을 모시기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마침 박 회장에게 비범한 한 인물이 있다는 보고가 올라갔다. 김 박사였다.
그는 당시 실무추진반의 이대공 상무의 설득에 1985년 6월 포항제철을 방문했고,
박 회장과 독대 후 초대 학장으로 낙점됐다.
#11.
김 박사가 박 회장에게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그는 대학 운영 전권과 그 당시로서는 생소했던 방사광가속기의 설치를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 두 조건은 오늘날 포스텍을 세계 굴지의 명문대학 반열에 오르게 한 초석이 됐다.
박 회장은 한국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앞을 내다봤던 김 박사의 마음을 읽고 함께 뜻을 모으기로 결심했다. 두 사람의 만남은 한국 과학기술의 미래를 여는 역사적인 순간이 됐다.
#12.
이때부터 그는 우수한 해외석학 유치를 위해 미국과 캐나다 등 한국인 인재들이
연구 활동을 하고 있는 세계 각지를 직접 돌아다니며 간곡한 설득작업을 벌였다.
그가 만난 한국인 과학자만 22개국 450여 명에 달했다.
김 박사는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그는 “유학을 온 사람은 공부가 끝났으면 조국으로 돌아갑시다.
한국에서의 일류대학은 포항공대가 마지막입니다”라고 열정을 보였다고 한다.
박 회장의 지원도 다각도로 이뤄졌다.
그 결과 우수한 학자들이 포스텍에 지원했고, 개교 때까지 66명의 교수를 초빙할 수 있었다.
#13.
당시 한국에서 최초로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던 포스텍은 새로운 개념의 대학이었다.
포스텍은 우수학생 모집, 대학원 조기 개설, 전원 박사학위 소지자 교수 채용,
중진교수 중심체계 구축 등 새로운 제도를 시행했고,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대학으로 성장해 나갔다.
포스텍이 단시간에 성공적으로 안착하면서 국내 다른 대학에도
연구중심대학 모델이 확산되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우리 대학이 가진 사명은 우리나라의 선진화와 문명화를 앞당기고, 우리가 과학기술 분야에서 외국에서 혜택을 입은 이상으로 과학과 기술을 해외에 수출하여 인류 복지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배달의 정예들이 모였다. 새로움을 여는 용광로의 불길이 우리의 열정이다."(포스텍 개교 인사말 중)
#14.
그는 하나의 시작을 만들어냈고, 그 시작에서 아름다운 끝을 향한 걸음을 디뎠다.
방사광가속기는 김 박사의 평생 숙원사업이었다.
그러나 그가 1,500억 원의 예산을 들여 방사광가속기를 건설하겠다고 발표했을 때
국내 과학계와 대다수 학자들은 사업 성공을 의심했었다.
천문학적인 예산 확보와 건설 규모의 방대함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여러 갈래의 회의론을 극복하고 이를 관철시켰다.
김 박사는 세계적인 가속기 연구자로서 자신의 경륜을 발휘하여
가속기 건설 과정을 진두지휘했고, 주요 핵심기술의 국산화를 달성하는 성과도 거두었다.
#15.
방사광가속기에 대한 그의 애정은 자식사랑과도 같았다.
그러나 1994년 4월 포스텍 교내 체육대회 중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그는,
그 해 12월 완공된 가속기를 보지 못했다.
세계에서 다섯 번째 제3세대 대형 방사광가속기로
한국에서는 최초이자 아직까지 유일한 포항방사광가속기는
현재까지 1만5천여 건(2017년 기준)의 연구 과제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한국의 기초과학 역량을 크게 높이고 있다.
이는 연구자이자 과학교육의 개혁가라는 그의 두 면모가 새겨진 유산으로서
그가 세운 빛나는 금자탑이라고 볼 수 있다.
#16.
"당신의 모든 것을 포항공대에 바쳤다. 포스텍에 대한 열정과 비전을 듣고서,
리더는 저 정도의 열정이 없으면 안되겠구나 생각했다.
포스텍에서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는 게 꿈이라고 하셨다.“
(故 김영길 한동대학교 초대 총장, 김호길 박사의 동생)
혁신적인 사고와 창의력으로 포스텍을 세계적 명문대로 만든 걸출한 개혁가, 김호길.
포스텍 신화를 만들어 가던 길목에서 그가 남긴 숙제는
현재의 과학기술계가 짊어져야 할 과제로 남아 있다.
과학기술유공자의 이름으로 우리의 곁에 찾아온 김호길 박사의 면면이 다시금 빛나야 할 때다.
제공 :
DdooSiKkoong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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