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 41
한국인 최초 국제기구 WHO 사무총장 역임
에이즈, 결핵, 소아마비 퇴치에 앞장선 아시아의 슈바이처
이종욱
세계 보건행정의 리더, 세계인의 건강을 책임지다
#2.
학력
1970~1976 |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1979~1981 | 미국 하와이대학 보건대학원 보건학 석사
2011 | 서울대학교 명예박사
경력
1983~1994 | WHO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 지역사무처 질병예방관리국장
1994~1998 | WHO 글로벌백신프로그램 및 어린이 백신사업 총괄 책임자
1998~2000 | WHO 선임정책자문관, 자원동원 및 대외협력 업무 담당 대표단
2000~2003 | WHO 결핵퇴치사업 국장
2003~2006 | WHO 제6대 사무총장
포상
2002 | 보건복지부 국민훈장 모란장
2004 | 대한적십자사 적십자 인도장 금장
2006 | 국민훈장 무궁화장
2008 | 대한의사협회‧한미약품 제1회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2010 | 세계한센포럼 한센공로상
#3.
“우리가 쓰는 돈은 가난한 나라 분담금도 섞여 있다. 그 돈으로 호강할 수 없다.”
일 년 중 150일 출장, 30만 km 비행, 이등석 좌석, 두 명의 수행원.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Man of Action’, 행동하는 사람이라 불렀다.
인류의 건강을 위해 한 평생 열정을 바친 이종욱 총장은
UN 산하기관의 수장자리에 올랐던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관행상 국가 원수급 예우를 받지만, 청빈한 생활로 타의 모범이 됐던 그는
흔한 아파트 한 채도 없이 평생을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아시아의 슈바이처 이종욱. 어떤 숭고한 사상보다 ‘행동’으로 보여준 그의 일생은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으며 그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있다.
#4.
이종욱 총장은 1945년 4월 12일 서울 서대문구 북아현동에서 태어났다.
덕수초등학교와 경복중학교, 경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하고자 했지만 낙방했다.
바로 군에 입대한 그는 제대 후 한양대학교 공과대학에 입학했지만,
의대를 향한 꿈은 버릴 수 없었다.
이 총장은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한 번 더 도전했고,
마침내 1970년 서울대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5.
동기들보다 5년 늦게 시작한 의학공부였지만,
의료봉사에 있어선 남들보다 늘 한 발짝 앞서 걸었던 그였다.
이 총장은 대학 재학 중 안양의 성 라자로 마을에서 한센병 환자를 위한
의료봉사에 참여하면서 일찍부터 사회활동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그는 평생을 함께 할 인연도 만나게 된다.
이 총장은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아픈 한국 사람들을 돕고자
천주교 봉사자의 자격으로 한국을 방문한 가부라키 레이코(鏑木珍子)와 사랑에 빠졌고,
1976년 12월 18일 명동성당에서 결실을 맺는다.
#6.
이 총장은 한센병을 더 공부하기 위해 학부 졸업 후 아내인 레이코 여사와
1979년 미국 하와이대학 보건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났고,
1981년 공중보건학 석사 과정을 마친 후 서른 여섯의 나이에
남태평양의 조그만 섬나라 사모아로 들어간다.
그곳의 린든 B. 존슨병원(Lyndon B. Johnson tropical medical center)에서
의사로 근무한 이 총장은 사모아의 가난한 사람들이 의료의 혜택을
전혀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고, 더욱 더 열정적으로 환자들을 돌보는 데 힘쓴다.
환자들은 그를 ‘아시아의 슈바이처’라고 불렀다.
#7.
이 총장이 WHO(세계보건기구)와 인연을 맺은 것도 바로 이 시기였다.
그는 당시 사모아에서의 활동과 더불어 ‘한센병 잠복기 발견을 위한 연구’를 통해
세계적인 한센병 전문가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WHO는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한센병 자문관으로 일해 달라고 요청했고,
수락한 이 총장은 1983년 피지로 건너가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는 지구촌 오지인 타히티와 뉴칼레도니아 등 남태평양 지역을 돌며
한센병 퇴치에 힘을 쏟았고, 후에는 결핵담당관으로 아동질병 예방에 나섰다.
#8.
이 총장은 서태평양 지역사무처 질병관리국장 자리를 거쳐
1994년 WHO 본부 예방백신국장을 맡아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스위스 근무 당시 그는 “우리의 미래이고 희망인 아이들에게 목숨을 잃거나
다리가 마비되는 고통을 줄 수 없다”며 ‘소아마비와의 전쟁’을 선포,
1년 후인 1995년 소아마비 발생률을 인구 1만 명 당 1명 이하로 떨어뜨리며
세계를 놀라게 했다.
미국 과학잡지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은 그를 ‘백신의 황제’로,
영국 의학전문지 『랜싯』은 그를 ‘조용한 뇌성’(Quiet Thunder)으로 칭하며 그의 성과에 주목했다.
#9.
이 총장은 1998년 할렘 브룬틀란 사무총장이 취임한 이후
총장의 특별보좌관을 시작으로 WHO의 정책부서를 두루 거쳐 갔다.
2000년 WHO 결핵퇴치사업 국장으로 부임한 뒤에는
현재까지 보건 분야에서 가장 성공적이고 활발한 민관협력 사업으로 평가받는
글로벌결핵퇴치파트너십(Global Partnership to Stop TB)과
글로벌약품조달기구(Global Drug Facility, GDF)의 출범을 이끌며
22개국의 결핵 고위험국을 대상으로 결핵퇴치사업을 추진했다.
#10.
그가 사무총장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건 WHO의 여러 보직을 거치며
내부의 문제점과 개혁 방안을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각국에서 지원한 80여 명의 후보와 경쟁을 벌인 그는
7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WHO 제6대 사무총장으로 선출됐다.
한국인 최초의 UN 전문기구 수장의 탄생이었다.
#11.
이 총장은 2003년 7월 취임하면서 2005년까지 세계 300만 명의 에이즈 환자에게 항에이즈 바이러스 치료제를 보급하겠다고 공약하고 ‘3 by 5 캠페인’을 추진했다.
당시 이 캠페인으로 새로운 희망을 얻은 100만 명의 목소리가 세계를 감동시키기도 했다.
예산과 일정 문제로 성공하진 못했지만, 현재도 세계 각국 지도자들은 ‘3 by 5 캠페인’을
공중보건 역사상 위대한 업적으로 인정하고 있다.
#12.
“적어도 실패는 시작하지 않은 것보다 훨씬 큰 결과를 남기는 법이야,
바로 그 점이 중요한 거야.”
그는 실패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이미 행동의 결과가 사람들의 관심으로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에이즈 확산 방지, 흡연 규제 등 다양한 업적을 인정받은 그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서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인’에 오르며
한국인의 위상을 세계에 드높였다.
#13.
그는 WHO의 보건 행정가로 활동하면서도 SCI급 논문 5편을 발표했다.
사무총장으로 활동한 2004-2007년에는 에이즈, 여성과 아이들, 보건의료인력, 건강과 평화 등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여러 가지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목적으로
“세계건강보고서(World Health Report)”를 남기기도 했다.
또한, WHO 사무총장으로 재임한 3년 동안 60여 개 국가를 방문해
미국, 프랑스, 러시아 정상에게 의료펀드 확대를 호소했다.
#14.
왕성한 활동을 하던 이 총장은 2006년 5월 WHO 총회 준비에 매달리다
갑자기 쓰러졌고, 스위스 제네바 칸토날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수술을 받았으나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영면하고 말았다.
전 세계는 ‘세상에서 가장 큰 의사’를 잃고 슬퍼했다.
한국 정부는 세계보건 증진을 위한 혁혁한 업적을 쌓아 국위를 선양한 그의 공적을 기려
2006년 대한민국 국민훈장 가운데 최고등급인 무궁화장을 추서했으며,
대한민국 과학기술유공자의 명예를 헌정했다.
#15.
그는 떠나고 없지만,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의 유지를 받들어 박애의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2008년 유가족들은 ‘한미 자랑스런 의사상’ 상금 1억 원을
‘이종욱 기념사업’을 전개하고 있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에 기부했다.
소외된 계층을 위한 이 총장의 뜻을 계승하기 위한 결정이었다.
이밖에도 재단은 이 총장이 추구해 온 삶의 정신을
대한민국의 미래 꿈나무들에게 전하기 위해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6.
“We must do the right things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합니다.
We must do them in the right places 올바른 장소에서 해야 하며,
And we must do them right way 올바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WHO 직원 연설 중-
옳은 일과 가치 있는 일을 실천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던 그가 가장 몰두했던 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돌보는 일이었다.
높은 지위와 명예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환자를 돌보는 것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고 항상 낮은 자세로 헌신했다.
가슴에 커다란 꿈을 품고 그것을 이루어내기 위해 올곧게 걸어갔던 이종욱 총장.
스스로 실천을 통해 증명해 온 그의 가르침이 많은 이들의 가슴 속에 반짝이고 있다.
제공 :
DdooSiKkoong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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