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양주 일대엔 능 뿐아니라 꽤 많은 원과 묘가 산재해 있었다
동구릉까지를 포함하면 하루로는 모자랄 듯해 미리 다녀왔지만 그럼에도 해가 짧아 시간이 여의치 않았다
예전엔 보지 못했던 광릉수목원 가로수길 주변에 놓인 데크길을 보면서 신록이 우거진 계절에 다시 와야겠다 생각했다
기억과는 사뭇 다른 봉선사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20여년 전 초파일엔 차량과 인파에 치여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오늘은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덕흥대원군묘 |
중종(中宗)의 일곱째 아들로, 중종의 후궁인 창빈안씨(昌嬪安氏)의 소생이고, 부인은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 정세호(鄭世虎)의 딸이다. 1567년(명종 22) 6월 명종이 후사(後嗣) 없이 죽자 초의 셋째 아들 하성군(河城君) 균(鈞)이 명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는데, 그가 곧 선조이다. 1569년(선조 2) 왕의 생부로 대원군에 추존되었다.
▲수많은 묘가 산재해 있어 찾기가 쉽지 않았다
▲덕흥대원군(선조의 아버지) 묘... 문인석은 없고 무인석만 있다
▲현록대부하원군(선조의 큰형, 덕흥대원군의 장남)지묘 (左), 남양군부인홍씨묘 (右)
흥국사 |
수락산 기슭에 위치한 흥국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가 창건한 사찰로 선조가 아버지 덕흥군을 이곳에 모시면서
원당을 짓고 흥덕사 편액을 하사하면서 부친의 명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고 한다
이후 백성들이 덕절이라 부르다 인조 때 중창을 하면서 흥국사로 개칭하였다
▲수락산행을 많이 해봤지만 이 코스는 처음 접한다
▲생각보다 규모도 컸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였다
순강원 |
선조의 후궁 인빈김 씨의 원
관리의 한계로 인해 원, 묘 등의 탐방은 당분간 제한되고 있었다
봉영사 |
신라 진평왕 때 창건된 봉선사의 말사로 봉인암으로 불리던 사찰
이후 인근에 선조의 후궁 인빈 김 씨와 둘째 아들 신성군의 묘가 있어 영조 때 묘역을 순강원으로 꾸미면서
재실과 신도비 정자각을 세워 원찰로 삼았다고 한다
▲천겸산에서 흐르는 약수가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박힌 돌로 큰 흉터를 지닌 고목의 모습이 애처롭다
▲이곳에도 광릉숲 둘레길이 있는 듯
광릉 / 제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윤 씨의 능 |
▲재실(齋室)
▲향로와 어로가 없는 모습이 특이하다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능 사이 얕은 계곡이 형성된 모양이 특이하다
▲조선 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마비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階下馬)
▲휘경원 또한 굳게 문이 닫혀 있고 코로나 19로 식당 이용도 불편해 봉선사 탐방에 앞서 점심을 해결했다
봉선사 |
969년 법인국사 탄문이 창건하여 운악사라 하였다.
그 후 1469년(예종 1) 정희왕후 윤씨가 광릉의 세조를 추모하여 89칸으로 중창하고 봉선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6.25 전란을 겪으며 많은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1969년에는 주지 운허가 큰법당 등의 법당을 중건했다
▲20여년 전 방문 당시엔 왜 이 연못을 보지 못했을까? 불가사의하다
▲정월대보름 달집 태우기를 할 모양이다
▲많은 건물의 편액이 한글이라 처음엔 생소했지만 친근하게 느껴진다
▲사찰 내 사물(四物) 중 운판(雲版)... 나머지 셋은 범종(梵鐘), 법고(法鼓), 목어(木魚)
▲능도 아닌 사찰인 봉선사에 하마비가 존재하는 이유?
봉선사에는 세조의 위패를 모신 ‘어실각(御室閣)’이 있었다고 했는데, 왕실에서는 봉선사의 주지를 ‘봉향판사(奉香判事)’로 봉해 어실각을 관리하게 했다. 이는 양반이나 유생들이 봉선사에서 난리를 피우지 못하도록 힘을 실어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봉선사에 하마비가 세워진 모습은 사찰이지만, 향교나 서원만큼이나 이곳을 존중하라는...
화성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 김희태 연구위원
▲540세 느티나무의 위용에 몸이 저절로 작아진다
사릉 /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 씨의 능 |
▲과거 능이 조성되면 사방 10리 이내엔 묘를 조성할 수 없거나 있던 묘는 이장을 해야 했지만
사릉엔 수많은 묘가 함께 있는데 이곳은 원래 혜주 정 씨의 선산이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어 영월에 유배되면서 본인은 궁에서 쫒겨났고
사후엔 묘를 경혜공주(단종의 누이)의 시댁 선산인 이곳에 모시고 제를 지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시누이와 한 능 안에 함께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능 안엔 이외에도 혜주 정 씨의 많은 묘가 산재해 있다
광해군묘 |
▲이곳 또한 출입문이 굳게 닫혀있다
▲철책 밖에서 바라본 광해군의 묘 (쌍묘)
▲광해군묘 맞은편엔 어마어마한 크기를 보이는 영락교회의 공원묘지가 산 전체를 뒤덮고 있다
▼아쉽게도 홍유릉은 매표 마감시간을 6분 넘겨 도착해 입장할 수 없어 돌아섰다
▲몇 십 년 만에 퇴근길 러시아워에 갇혀 크리스마스 이브의 야경을 보게 되었다 (아모레퍼시픽 본사와 LS용산타워)
사찰에 비치된 사물(四物) 범종(梵鐘) 절에서는 아침 저녁으로 범종을 울려 주위 사람들에게 시작을 알림은 물론 불사의 의식인 법요(法要)와 포교가 있을 때 그 개시를 알리기 위해 치기도 한다. 하지만 범종을 치는 본뜻은 지옥의 중생들이 모두 고통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도록 하는 동시에, 불법의 장엄한 진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 있었다 법고(法鼓) 주지가 대중에게 설법하는 상당(上堂)과 보설(普說) 등의 법요식 때 쓰는 큰 북을 말하며, 북소리를 통하여 속세의 모든 축생(畜生)을 제도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북소리가 널리 세간에 퍼지는 것을 불법이 널리 퍼지는 것에 비유하며, 또 교법(敎法)이 중생의 번뇌를 없애는 것을 마치 진을 치고 있던 군대들이 전진하라는 북소리에 맞춰 적군을 무찌르는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목어(木魚) 목어고(木魚鼓), 어고(魚鼓), 어판(魚板)이라고도 하며 나무를 깎아 잉어 모양을 만들고 속이 비게 파내어 불사에 쓰는 기구이다. 물고기 모양을 취한 데에는 물고기가 언제나 눈을 뜨고 깨어 있으므로 그 모양을 따서 나무에 조각하고 두드림으로써 수행자의 잠을 쫓고 혼미를 경책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통도사의 목어처럼 완전한 물고기 형상을 취하였으나 차츰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을 취한 용두어신(龍頭魚身)의 형태로 변하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으로 정착되었다. 목어가 여의주를 물고 있는 것은 온갖 속박에서 벗어나 어떤 것에도 구애되지 않고 자유로운 대자재(大自在)를 얻은 물고기(중생 또는 보살)를 상징한다. 운판(雲版) 판형으로 주조하여 구름 모양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운판에 새겨진 문양을 보면 구름 위에 해와 달을 좌우에 배치하였거나 전면을 구름 모양으로 채운 경우가 많다. 때로는 범어로 ‘옴마니반메훔’ 다섯 자를 새겨놓기도 한다. 원래 끼니때를 알리는 용도로 썼다고 하나, 요즘은 조석 예불 때 치는 의식용구로 사용된다. 운판은 공중을 날아다니는 중생을 제도하고 허공을 헤매 떠도는 영혼을 천도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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