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릉 |
온릉은 조선 11대 중종의 첫 번째 왕비 단경왕후 신씨의 능으로 단릉의 형식이다. 1739년(영조 15)에 단경왕후가 복위되면서 조선 후기의 추존왕비릉 제도로 새롭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1쌍과 석호 1쌍을 배치하였다.
중종의 폐비 신씨가 1557년(명종 12)에 세상을 떠나자 친정집안인 거창 신씨의 묘역에 묘를 조성하였다.이후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능호를 온릉(溫陵)이라 하고 정릉(貞陵)과 사릉(思陵)의 예에 따라 새롭게 조성하였다.
파주 삼릉 / 공릉, 순릉, 영릉 |
공릉은 조선 8대 예종의 첫 번째 왕비 장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홍살문과 정자각 사이에 있는 향로는 직선축이 아닌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조선전기 묘제의 형식에 맞게 조성하였기 때문에 망주석을 생략하였고, 봉분을 크게 조성하였다
1461년(세조 7)에 장순왕후 한씨가 왕세자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이듬해인 1462년(세조 8)에 파주 보시동(普施洞)인 현재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470년(성종 1)에 장순왕후로 추존하고 능의 이름을 공릉이라 하였다.
영릉은 추존 진종소황제와 효순소황후 조씨의 능이다. 영릉은 같은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으로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진종소황제, 오른쪽이 효순소황후의 능이다.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검소하게 조성하였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영릉의 비각은 총 2개로 비각 안에는 세 기의 능표석이 있다. 1비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비, 2비는 진종대왕(眞宗大王)의 비, 3비는 진종소황제(眞宗昭皇帝)의 비로 진종이 추존될 때마다 능표석을 새로 세웠다.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1쌍씩 배치하였다. 문석인은 관모를 쓰고 양손으로는 홀(笏)을 쥐고 있으며 얼굴에 비해 몸은 왜소한 편이다. 관복의 소매는 길게 늘어져 있고, 팔꿈치 부근에는 세 줄의 주름이 새겨져 있다
1728년(영조 4)에 진종이 왕세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29년(영조 5)에 파주 순릉 왼쪽언덕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1751년(영조 27)에 효순소황후가 왕세자빈(현빈)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52년(영조 28)에 효장세자묘 왼쪽에 묘를 조성하였다. 그 후 1776년에 영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조의 계승상 아버지가 되는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면서 능의 이름을 영릉이라 하였다.
취두(鷲頭) 아래 3마리(홀수)의 짐승을 두지만 대한문(10), 융건릉(4)과 같이 짝수로 두는 경우도 있다 함
서유기에서 등장하는 동물을 빌린 것으로 숫자와 상관없이 삼재(三災) 물, 불, 바람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순릉은 조선 9대 성종의 첫 번째 왕비 공혜왕후 한씨의 단릉이다. 파주 삼릉 내에 있는 3기의 능 중에서 유일하게 왕릉의 형식으로 조성한 능인데, 공혜왕후는 중전의 신분에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 수라간,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각에는 한 기의 능표석이 있는데 ‘조선국 공혜왕후 순릉(朝鮮國 恭惠王后 順陵)’이라고 새겨져 있다. 능침은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 2쌍씩 배치하였다. 장명등은 공릉의 장명등과 시기적으로 차이가 있어 세부적인 모습은 조금 다르지만 조선 전기 장명등의 전반적인 모습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점에서 비슷하다. 무석인은 머리에 투구를 쓰고 양손으로는 칼을 잡고 무관의 갑옷을 입고 목을 움츠린 모습이다. 갑옷의 선은 뚜렷하지만 얼굴은 다소 경색된 표정을 하고 있다.
1475년(성종 5)에 공혜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장순왕후의 공릉이 있는 파주에 능을 조성하였다.
장릉 |
장릉은 조선 16대 인조와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의 능으로 합장릉의 형식이다. 장릉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었다가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면서 합장릉으로 조성하였다. 특히 옛 장릉의 석물과 천장하면서 다시 세운 석물이 같이 있어 17세기와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재실, 금천교,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향로와 어로는 숙종의 명릉처럼 양 옆에 변로를 깔았다. 능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둘렀으며,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과 석호를 배치하였다. 혼유석은 합장릉의 형태로 2좌를 배치하였다. 특히 천장하면서 병풍석을 둘렀는데, 병풍석에는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하여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1635년(인조 13)에 인조의 첫 번째 왕비 인열왕후 한씨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636년에 파주 운천리에 능을 조성하였다. 이때 인조는 자신의 능자리를 미리 공사하였다. 이후 1649년(인조 27)에 인조가 세상을 떠나자 쌍릉의 형태로 능을 조성하였다. 그러나 장릉에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에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변이 계속되자 1731년(영조 7)에 현재의 자리로 천장하였다.
검단사 |
장릉의 원찰인 검단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봉선사의 말사이다. 847년(신라 문성왕 9) 혜소(慧昭)가 창건. 혜소는 얼굴색이 검어 흑두타(黑頭陀) 또는 검단(黔丹)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찰 이름은 그의 별명에서 유래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사찰이 있는 오두산이 검은 편이라 검단사라고 하였다고도 한다
창건 당시에는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파주시 문산읍 운천리에 있었으나, 1731년 장릉(長陵)을 탄현면 갈현리로 옮길 때 함께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이후 장릉에 제사를 지낼 때는 이 사찰에서 두부를 만들었다고 해서 한때는 두구사(豆拘寺)라고도 불렀다.
사찰 정면에 북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멋진 조망을 갖고 있다
대웅전, 대웅보전, 무량수전
우리나라 사찰의 주불전은 대개가 대웅전(大雄殿)이다.
대웅전은 석가모니불을 모신 전각인데, 이는 석가모니가 불교의 교조이기 때문이다.
대웅(大雄)은 고대 인도의 마하비라를 번역한 말로, 법화경에서 석가모니를 위대한 영웅, 즉 대웅이라 일컬은 데서 유래
대웅전에는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는 수미단(須彌壇)과 여러 신들을 모신 신중단(神衆壇), 그리고 영가(靈駕; 죽은 이의 혼백)를 모신 영단(靈壇)을 두고 각 단마다 탱화를 모신다.
대웅전의 중심에 불상을 안치하고 있는 불단을 수미단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세계관을 반영한 것인데, 부처님이 세계의 중심에 위치한 수미산(須彌山) 꼭대기에서 자비와 지혜의 빛을 발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대웅전을 대웅보전(大雄寶殿)이라 일컫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모시는 불보살의 배치 여하에 따른 이름이다.
대웅전에는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의 좌우에 협시불(脇侍佛)을 모시는데, 왼쪽에는 문수보살을, 오른쪽에는 보현보살을 모신다. 그런데 협시불이 보살이 아닌 부처를 모시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 세 분의 부처를 함께 모시는바, 삼계불(三界佛) 또는 삼세불(三世佛), 삼신불(三身佛) 등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보살 아닌 부처를 협시로 할 때, 대웅전의 격을 높여 대웅보전이라 부른다
서방 극락정토의 주재자인 아미타불을 모시는 건물로 무량수전, 극락보전ㆍ극락전ㆍ무량전ㆍ보광명전(普光明殿)ㆍ아미타전 등이라고도 한다.
소령원, 수길원 |
소령원은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이자 21대 영조의 사친인 숙빈 최씨의 원이다. 원의 구성은 왕릉의 형식과 비슷하게 조성되었다. 소령원 입구에는 영조가 왕위에 오른 후에 세운 신도비각이 있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에 시묘살이를 했던 터가 남아 있다.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 수복방, 정자각, 비각이 있다. 비각은 두 개가 있는데 1비는 1744년(영조 20)에 소령묘(昭寧墓)로 추존한 비, 2비는 1753년(영조 29)에 소령원(昭寧園)으로 추존한 비이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묘표석, 석양과 석호 1쌍이 배치되어 있다. 석마 옆에는 중배설석이라는 석물이 있으며, 묘표석은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난 후에 세운 표석이다.
1718년(숙종 44)에 숙빈 최씨가 세상을 떠나 처음 숙빈묘를 조성하였다. 이후 영조가 즉위한 후 1725년(영조 1)에 신도비를 세웠으며, 1744년(영조 20)에 묘의 이름을 소령묘라 하였다. 그 후 1753년(영조 29)에 왕의 사친 추존제도가 성립된 후에 원으로 격상하여 이름을 소령원이라 하였다.
수길원은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이자 추존 진종의 사친인 정빈 이씨의 원이다. 원의 구성은 왕릉의 형식과 비슷하게 조성되었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향로와 어로가 있고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은 소실되어 터만 남아 있다. 원침에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문석인, 석마, 장명등, 상석, 원표석이 있으며 석양과 석호는 배치하지 않았다. 원표석에는 ‘대한 온희정빈 수길원(大韓 溫僖靖嬪 綏吉園)’이라 새겨져 있다.
1721년(경종 1)에 정빈 이씨가 소훈(昭訓, 내명부 세자궁 종5품 후궁)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 양주 고령동 옹장리인 지금의 자리에 묘를 조성하였다. 1776년에 정조가 왕위에 오르고 효장세자가 진종으로 추존되자 왕의 사친으로 추존되어 1778년(정조 2)에 원의 이름을 수길원이라 하였다.
보광사 / 파주 삼릉과 소령원, 수길원의 원찰 |
조선의 임금 가운데 효심이 지극했던 임금으로 정조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정조 외에도 재위 내내 어머니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정조의 할아버지인 영조다. 무수리로 궁에 들어가 내명부 정1품인 숙빈에까지 오른 숙빈 최씨가 바로 영조의 어머니이자 드라마 〈동이〉의 주인공인 동이다. 보광사는 숙빈 최씨가 잠들어 있는 소령원의 원찰로 왕실의 시주가 구한말까지 이어진 큰 사찰이다.
보광사엔 3개의 암자(도솔암, 영묘암, 수구암)가 함께할 정도로 생각보다 규모가 큰 사찰이었다
한밤중에 도착에 세세하게 볼 수는 없었지만 덕분에 고요한 산사를 울리는 스님의 타종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Bob Dylan / Knockin' On Heaven's Do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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