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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문화탐방

1/5 [조선 왕릉 탐방, 연산군묘~정릉 (북한산둘레길 18~20구간) ⑩]

by 뚜시꿍야 2021. 1. 5.

 

연산군묘를 찾기 위해 다시 찾은 북한산둘레길 18~20구간

춥다는 일기예보에 북한산 둘레길엔 평소보다 인적이 뜸했다

20구간의 마침표를 찍고 내친김에 정릉과 흥천사까지를 다시 돌아봤다

 

함께한 분은 창포원서 서울둘레길 스탬프도 찍고...

 

쌀쌀한 날씨 덕에 하늘은 파랗다 못해 미세먼지 1도 없이 시퍼렇다

 

북한산 둘레길 18구간 스탬프도 찍고...

 

 

예전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둘레길에 조성된 수많은 묘들... 정경부인 묘 3기가 조성

 

도봉산 선만자도 뚜렷하게 보이고...

 

수락산과 불암산도...

 

저 멀리 예봉산과 검단산도...

 

  정의공주

 

정의공주는 조선 4대 국왕 세종()의 차녀로, 어머니는 소헌왕후() 심씨()이다.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였고, 『지장보살 본원경()』을 간행하였다  오빠가 문종이고 동생이 세조이다

 

정의공주 묘

 

 

 

  연산군 묘

 

다른 묘나 원은 모두 폐쇄 중이었으나 이곳 연산군 묘만큼은 늘 개방되어 있다

연산군묘는 조선 10대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의 묘소이다. 묘소는 대군묘제로 조성하였다.

쌍분의 형태로 조성되어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고, 문석인 2쌍, 망주석, 장명등, 상석, 향로석을 배치하였다.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이 연산군묘, 오른쪽이 거창군부인묘소로 각 봉분 앞에는 묘표석을 세웠다.

묘소 밑에는 재실이 있다.


같은 묘역 안에는 태종의 후궁 의정궁주 조씨, 연산군의 딸(휘순공주)과 사위(능양위 구문경)의 쌍분이 조성되어 있다

 

 

 

 

 

 

 

 

  정릉 /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부인인 신덕왕후 강 씨의

 

1396년(태조 5)에 신덕고황후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취현방(현 영국대사관 근처)에 정릉을 조성하고, 훗날 자신이 묻힐 자리까지 함께 조성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즉위한 후 태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정릉은 푸대접을 받기 시작하였다. 태종은 정릉의 능역 100보 근처까지 집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고, 정릉이 도성 안에 있다는 이유로 사을한산(현 정릉)으로 천장하였다. 이 후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에 무너지자 능의 석물 중 병풍석과 난간석을 광통교 복구에 사용하였으며, 그 밖에 목재나 석재들은 태평관을 짓는 데 쓰게 하도록 하였다.  민묘나 다름없었던 정릉은 260여 년이 지난 1669년(현종 10)에 왕릉의 상설을 갖추게 되었다.

 

단릉의 형식으로, 능침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를 배치하였다. 장명등과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만이 조성당시의 것이며 나머지 석물은 현종 대에 다시 조성하였다. 장명등은 고려시대 공민왕릉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조선시대 능역의 가장 오래된 석물인 동시에 예술적 가치가 높다.
능침아래에는 홍살문,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있고, 일반 조선왕릉과 달리 직선축이 아닌 자연 지형에 맞추어 절선축으로 조성되었다

 

 

 

 

 

재실

 

 

 

 

 

  흥천사 / 정릉의 원찰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1395년(태조 4) 신덕왕후 강씨(神德王后康氏)가 죽자 1396년 능지(陵地)를 정릉(貞陵)에 정하여 조영(造營)하고, 그 원당(願堂)으로 능 동쪽에 170여 칸의 절을 세워 흥천사라 칭하였으며, 조계종의 본산(本山)으로 삼았다. 초창기 이 절은 좌선(坐禪)을 하는 것으로 항규를 삼았다

 

 

 

극락보전, 전엔 미처 못봤던 천수관음상이 오른쪽에 관음보살이 왼쪽에 놓여있으니 가운데는 아미타불인 듯

 

벽에 12지신상이...

 

삼족섬(三足蟾), 세 발 달린 두꺼비로 신성시되는 동물이라고 한다

 

 

  적조사

 

조계사의 말사로 헌종 때 혜암성혜 주지에 의해 세워진 적조암이 시초였으나 훗날 조계종 사찰로 승격

 

 

 

 

Elton John / Tonigh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