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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문화탐방

4월 7일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 1일차 경주 남산지구]

by 뚜시꿍야 2025. 4. 11.

개인적으로 5th 버킷 리스트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 탐방]을 계획하고
이러 저런 이유로 한동안 일정을 소화하지 못했다
올해는 작심하고 준비를 했지만 막상 떠나려 하니 어느 곳을 먼저 해야 할지 선택이 쉽지 않았다
지난번처럼 장거리 이동이 체력적으로 쉽지 않다 생각하고 경주 일대를 탐방하기로 했다
막상 4일간의 일정을 마치고 나니 경주권에서만 차량으로 300Km를 이동한 힘든 일정이었다

경주 남산지구 : 칠불암 마애석불, 불곡 석불좌상, 탑곡 마애조상군, 용장사곡 삼층석탑, 천룡사지 삼층석탑, 남산리 삼층석탑
월성지구 : 월성, 계림, 첨성대, 내물왕릉
대원릉지구 : 미추왕릉, 황남리고분군, 노동리고분군, 노서리고분군, 오릉, 재매정
황룡사지구 : 황룡사지, 분황사석탑
산성지구 : 명활산성
역사마을 : 경주 양동마을
서원 : 옥산서원

기타 : 포석정, 금리단길, 토함산 석굴암, 교촌마을, 동궁과월지, 골굴사, 108산사 평화순례지 함월산 기림사

1일차 남산지구 산행
삼릉주차장~금오봉~용장사지~칠불암~신선암~고위봉~천룡사지 / 13Km
경주남산불곡마애여래좌상 / 1.5Km
옥룡암~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 / 0.5Km

 

 

 

삼릉 : 경주 배동 삼릉은 경주 남산의 서쪽 기슭에 동서로 3개의 왕릉이 나란히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밑으로부터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고 있다. 무덤은 모두 원형으로 흙을 쌓아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신덕왕릉이라 전해오는 가운데의 무덤은 1953년과 1963년에 도굴 당하여, 내부를 조사한 결과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임을 확인하였다. 무덤에는 돌방 벽면에 병풍을 돌려 세워 놓은 것처럼 동·서 양벽의 일부에 색이 칠해져 있는데, 이것은 본격적인 벽화는 아니지만 벽화가 그려지지 않은 경주의 신라 무덤에서는 처음 발견되는 것으로 주목되는 자료이다. 색은 붉은색, 황색, 백색, 군청색, 감청색으로 되어있고, 12폭으로 되어있다. 경주 배동 삼릉의 주인공이 신라의 박씨 3왕이라 전하고 있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신라 초기의 아달라왕과 신덕왕, 경명왕 사이에는 무려 700여년의 차이가 있어 이들의 무덤이 한곳에 모여있다는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한 신라 초기에는 이와 같은 대형무덤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었다.

소나무 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배병우 님은 
이곳 삼릉숲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초입부터 만개한 진달래가 반긴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능선에 오르니 경주시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조망이 터진다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

 

 

2015년 이후 만 10년 만에 다시 찾은 금오산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이곳 용장사에서 매월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썼다고 한다

 

석탑의 위치가 비슬산 대견사의 삼층석탑 못지않게
멋진 조망을 보이는 위치에 있다

대연화대

 

 

 

 

 

 

 

 

칠불암을 찾아가는 길은 완전 빡센 경사지로 원점회귀한다

칠불암을 가기에 앞서 먼저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을 찾았다

 

칠불암은 내가 생각하는 단촐한 암자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인다

 

 

경주 남산 칠불암마애불상군 : 가파른 산비탈을 깎고 높이 4m 가량의 축대를 쌓아 만든 불단 위에 모셔져 있는 불상군이다. 병풍바위에 새긴 삼존불과 사각 돌기둥에 새긴 사면석불상(四面石佛像)으로, 모두 칠불(七佛)이 모셔져 있다.  그동안 사면석불암은 수덕사 등에서 봐왔던 인공 대리석이었는데 자연석의 사면석불상은 처음이다

 

 

 

 

 

지금껏 봐왔던 여느 마애불상보다 더 입체감이 있어 보인다

이곳 칠불암에는 적멸보궁의 그것처럼 
법당 내에 불상을 모시지 않고
마애불상군을 바라보는 위치에 
통유리를 만들어 불상을 대신하고 있었다

 

 

지나온 금오봉을 바라보면서 천룡사지로 향한다

 

 

 

 

흔적만 남은 천룡사지

천룡사 : 서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高位山) 정상 부근에 자리한 천룡사는 신라시대 때 천녀(天女)와 용녀(龍女)라는 두 딸을 가진 부모가 딸들을 위해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천룡사는 지리적으로 큰 역할을 하는 사찰이었다. 그것은 이 절이 계림(鷄林) 땅을 흐르는 한 줄기의 객수(客水)와 한 줄기의 역수(逆水)의 근원지에 있으면서 객수와 역수의 조화를 유지시키는 위치에 있고 그 일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리를 아는 당(唐)의 사자(使者) 악붕귀(樂鵬龜)는 “이 절을 파괴하면 나라가 망한다.”라고 했다. 신라 말기에 와서 어느 사이엔가 절이 폐사가가 되고 과연 나라도 망하고 말았다. 이처럼 신라시대에 천룡사는 없어지면 나라가 망한다고까지 존숭되고 석가 만일도량(萬日道場)이 열릴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 천룡사에서 열렸던 석가 만일도량에 관해서는 고려 때 최승로가 지은 글이 남아 있는데, 10,000일이면 거의 30년에 해당하는 셈인데, 이렇게 오랜 기간 동안 끊임없이 법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신라의 대표적 사찰 가운데 하나인 천룡사가 언제 폐허가 되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고려의 재상 최승로의 아들 최제안이 천룡사를 중건한 이야기가 전하므로 고려 후기까지 법등이 이어졌음을 알 수 있지만 그 뒤의 역사는 전혀 전하는 것이 없어 아쉬움을 준다. 현재 유일하게 옛 터에 남아있는 천룡사 삼층석탑은 본래 무너져 있던 것을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에서 발굴 조사하여 1991년 9월 25일에 복원하였으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폐석탑이었던 이 탑이 복원되는 데는 용성(龍城) 스님의 유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용성 스님은 호국호법도량 천룡사가 흥할 때 국가도 흥했던 역사를 돌이켜보면서 우리나라 8백 년 국운과 불법 중훙을 위해 천룡사 복원을 제자 동헌 스님에게 부촉했다.

그리고 동헌 스님으로부터 이 부촉을 이어받은 도문 스님은 20여 년에 걸쳐 농가로 변한 천룡사지 6만여 평을 구입하였다. 축대석, 초석, 석당(石幢)의 귀부, 맷돌 등과 함께 폐탑의 부재들이 산재해 대가람이었음을 보여주는 빈터에서 석탑만이라도 먼저 복원하여 옛 모습을 찾기로 하고 동국대 경주캠퍼스 박물관이 주관하여 90년 11월 탑지 주변을 발론하고 91년 8월~9월에 복원 완공했다. 이 탑에는 정영호 박사가 기증한 4과의 세존 진신사리를 순은으로 된 2중 원통형 사리 병과 백자로 된 사리함에 모셔 봉안했고, 호국호법 삼부경과 그 외 경전과 소탑 및 순은 판에 쓴 석탑 복원 연기문을 함께 모셨다고 한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中]

 

경주 남산 천룡사지 삼층석탑

 

 

온 산이 연두연두한 게 참으로 예쁘다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조각하기 쉽지 않은 화강암에 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새긴 모습은 처음이다

 

 

 

옥룡암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은 경주시 남산 탑곡에 있는 남북국시대 신라의 마애불 여럿이다. 9미터나 되는 사각형의 커다란 바위에 마애불상군의 만다라적인 조각이 회화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바위의 네 면에 거의 빈틈없이 여러 상들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보살상·스님의 조각상·비천상 등 23구의 조상이 있을 뿐 아니라 황룡사9층탑과, 7층탑, 암수 사자상, 보리수로 보이는 나무 등을 조각하여, 천상과 지상의 정토를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두 암벽을 갈아 부조로 새긴 것이며, 남면에 입체 여래상 1구가 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01호 경주남산탑곡마애조상군(慶州南山塔谷磨崖彫像群)으로 지정되었다가, 2010년 8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출처 : 위키백과]

숨겨진 그림을 찾는 재미가 솔솔했다
왼쪽과 오른쪽 아래에 각가 암사자와 숫사자가 있다는데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경주 남산 탑곡 제2사지 삼층석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