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관이란?
환관이나 내시는 양근 및 음낭이 제거된 남자인데, 그 때문에 육체적 변화가 일어나 남성적인 특징이 퇴화해서 중성화하고, 여성적인 동작이 현저해집니다. 또한 음성이 변하고 수염도 빠지며, 성격도 감정의 기복이 심하여 사소한 일에 감격하고, 또 갑자기 성질을 부리기도 합니다. 육체적 결함을 의식하여 항상 열등감을 지녀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약점을 지적받기라도 하면 심한 모욕을 느껴, 때로는 떼를 지어 달려들기도 합니다. 강자에는 영합적이고, 군주를 측근에서 받들면서 여러 기밀에 접하는 기회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권력을 장악해서 정치를 혼란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중국의 환관이 권력을 쥘수있었던 이유.
중국에서 환관이 권력을 휘두를수 있었던것은 역시 바로 황제와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지배자인 황제와 같이 많은 여자를 거느린 경우에는 그 질서와 순결 및 비밀 등을 유지하기 위해서 중성의 환관을 필요로 했습니다.게다가 중국의 한과 당나라 시대에 많은 황제들은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어 어머니인 태후가 섭정이 되는데, 직접 남성인 대신과 면접하는 일을 피해서 정령의 전달을 환관이 맡았기 때문에 그 세력을 크게 뻗칠수 있었던것 입니다.
그리나 환관이 권력을 행사하게된 직접적인 이유는 황제와 환관이 직접적으로 연계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즉 황제가 어린나이에 황제로 즉위했을때 환관이 직접 황제를 업어서 키운 경우가 많았고 이에 황제가 즉위하게 되면 자기의 친부모처럼 가깝게 여기게 되어 중국 역사에 있어서 그토록 많은 폐단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던 것입니다.특히 후한 말의 영제는 환관의 최고위직에 있던 장양과 조충을 향해서 '장상시는 나의 아버지, 조상시는 나의 어머니'라고 입버릇처럼 하였다고 까지 합니다.
그러니 동양적인 특징인 인정에 약한 황제가 이들 환관이 추천하는 인물들을 검증하지 못하고 바로 권력자의 위치에 올라 국정을 도탄에 빠뜨리는일이 비일 비재하였던것입니다.당나라 현종때에 중용된 고력사는 광둥 남부의 만료족 출신이었고, 안녹산의 총애를 받았던 이저아는 거란인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현종 때부터 점차 권세를 지니게 된 환관은 대신의 임면, 황제의 폐립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당나라 때 환관의 전횡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송.원시대에는 환관의 전횡이 어느 정도 가라앉았으나, 그럼에도 동관.양사성.등의 환관이 국정을 좌지우지하였습니다.
물론 환관 가운데는 정사를 잘도운 환관도 있었습니다.후한의 채륜은 종이를 발명하였다고 하며, 명나라의 정화와 같이 남해에서 크게 국위를 떨친 예도 있는데, 이는 환관 전체에서 보면 극히 일부입니다. 청나라에 이르러 환관의 폐해는 적었으나, 서태후가 정권을 흔들었을 때에는 안득해·이연영등이 권세를 누렸습니다. 그러나 1912년 청나라의 멸망과 더불어 중국의 환관도 자취를 감추고 맙니다.
한국의 환관.
우리나라의 경우 왕의 후계자가 태어나면 주로 나인들의 손에서 양육을 받았습니다. 물론 환관을 옆에 두어 잡무를 처리하게는 하였으나 왕의 후손과 직접적으로 밀접한 연관성을 맺게 될 가능성은 비교적 적었다고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려 의종 때에 내시가 된 환관 정성과 백선연은 왕의 총애를 받아 횡포를 부리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초기의 환관은 그 득세와 폐를 막기 위해 액정국의 잡무와 남반과 같은 한품(7품 이상 오르지 못함)의 직에 서용하고 정직에는 임명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충렬왕비 제국대장공주가 환관 수명을 그의 친정인 원나라의 세조에게 바친 이후로는 환관의 진공 요구가 빈번하였습니다. 따라서 그전에는 거세를 수술에 의하지 않고 흔히 갓난아이 때 개가 물게 하는 극히 위험하고 원시적인 방법으로 하였으나, 원나라와의 관계 이후 그 수요량이 증가하자 수술방법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원나라에 들어간 환관들은 대개 그곳 황실의 총애를 받아 원나라의 사신으로 본국에 오는 등 영향력을 행사하여 고려로부터 군에 봉작되고 가족까지도 혜택을 입게 되자 모두 이를 부러워하여 아버지는 아들을, 형은 아우를 거세하여 원나라에 들어가 환관이 되는 것을 출세의 첩경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원나라에 들어간 환관 가운데는 본국을 중상하고 악질적인 불법행위를 자행하는 자도 있었는데, 충선왕 때의 백안독고사.방신우.이대순 충혜왕 때의 고용진 등이 가장 심하였습니다. 특히 백안독고사는 원나라 영종에게 참소하여 원한을 품고 있던 충선왕을 토번에 귀양을 보내게도 하였습니다. 국내에서도 환관의 관청인 내시부를 두어 환관이 궁중의 요소요소에 배치되자, 이들이 왕의 측근에서 권력을 잡아 정치에 개입하고 대토지를 점유하는 등 정치질서를 문란하게 하였습니다. 고려 마지막 왕 공양왕 때에는 내시직을 맡았던 환관은 100명에 이르렀습니다
조선시대에도 내시부에 환관을 두고 대전,왕비전,세자궁.빈궁등에서 감선·사명및 잡무 등을 맡게 하였는데, 그 수는 240명에 이르고, 그 중 59명이 종2품의 상선을 비롯해 종9품의 상원에 이르기까지 관계를 가졌었는데 관제상 일반관직과 구별하고 내시부를 승정원에서 담당하여 엄히 규제하여 고려와 같은 큰 폐단은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의 내시부는 고려의 제도를 본받은 것이었지만, 내시의 폐가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그 세력을 철저히 통제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왕비 등의 측근에 있음을 기화로 경제적 이권을 챙겼으며, 정치세력과도 연결되어 궁중의 공기를 크게 좌우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조선정부는 환관의 가계 단절에 배려하여 수양자법에는 동성에 한하여 양자를 삼도록 되어 있었으나 환관에게는 이성의 양자를 택할 수도 있게 하였으며, 환관도 처첩을 거느리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환관제도는 1894년(고종 31)의 갑오개혁 때 폐지되었습니다. 지금의 서울 효자동의 명칭은 원래 환관인 화자가 많이 산다 해서 화자동이라 하다가 후에 이 음과 비슷한 효자동으로 고쳤다고 합니다.
일본의 내시
일본에는 남성을 거세하는 제도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본에서 내시라는 직종은 없었습니다.
일본의 경우 중국 당나라에서 성행하였던 대륙문화를 받아들였지만, 왠일인지 환관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중국에서의 환관의 존재이유의 하나로는 후궁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내정의 운영을 위해, 형벌로서의 궁형(거세의 형벌)이 있었기 때문에 등을 들 수 있습니다.
일본에 있어서 중국과 후궁의 개념이 틀리고, 정숙이라고 하는 개념이 약했기 때문에, 후궁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해서 굳이 거세한 남성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또 내정의 운영도 여성관리에 의해서 운영되었고,일부러 내시를 채용하지 않아도, 문제는 없었습니다.
또, 궁형이라는 것이은 당나라 전의 왕조인 수나라에 폐지되었기때문에, 제도로서는 당의 시대에는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의 형벌제도를 받아들여도 궁형이라고 하는 것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이유에 의해서 일본에는 남성을 거세하는 환관제도가 들어오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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