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35세.3번의 어깨 수술.
직구 구속은 130㎞ 중후반.
올시즌 10경기에 등판해 3승 5패 방어율 6.33
연투 불가능으로 불펜 효율 떨어짐.
한국시리즈를 앞둔 감독이라면 이런 투수를 엔트리에 포함시킬 것인가.
KIA 조범현 감독은 "그렇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묻는다. "왜"
1997년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KIA의 전신 해태는 느긋하게 파트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종범, 홍현우, 장성호 등이 버틴 타선도 쟁쟁했지만 무엇보다 시리즈의 향방을 결정짓는 1차전 선발이 확실했다.
팀을 8번이나 우승시킨 명장 김응룡 감독은 이대진에게 임무를 맡겼다.
누구도 김 감독의 선택에 의문부호를 달지 않았다.
이대진이 '에이스 오브 에이스'로 불리던 시절이었다.
이대진은 LG와의 한국시리즈 1차전과 4차전 선발로 등판해 2승 방어율 1.38로 날았고 팀은 시리즈 전적 4승 1패로
우승을 차지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였다.
"그때는 몰랐어요. 한국시리즈 무대를 다시 밟는데 12년이 걸릴 줄은…."
이대진 뿐 아니었다. 야구 관계자와 많은 팬들도 그때는 몰랐다.
이대진과 해태라는 당대 최강의 팀이 이후 그렇게 가라앉을 줄은.
1993년 데뷔해 98년까지 6년 동안 76승을 거둔 이대진은 1998년 이후 어깨 회전근육이 뼈와 부딪히는 충돌증후군이라는
부상에 시달렸다. 2000년에 37경기에 등판 8승 6패를 기록했지만 무리한 등판이 화근이 돼 의사로부터 '다시는 공을 던질
수 없다'는 투수로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대진과 함께 해태도 몰락했다.
모기업이 재정난에 시달리며 해태에서 KIA로 바뀌었고 팀은 하위권을 맴돌았다.
2007년 4월 잠실 LG전에 한 선수가 등판한다.
3루측 KIA 응원석은 3년 11개월 동안 승리가 없던 투수에게 노란 손수건을 흔들고 종이학 3000마리를 날리며 열렬한
응원을 보냈다. 그것은 선수가 아닌 KIA, 팀 정신에게 보내는 응원이었다.
이대진 아니 KIA는 6이닝 3안타 무실점으로 승리를 기록했다. 이대진은 "'팬들이 아직 나를 포기하지 않았구나.
팬들보다 먼저 야구를 포기하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회상했다.
이대진의 부활 그것은 곧 KIA의 부활이었다.
'사람들은 최고라 불리우는 자는 머리로 기억하지만 최선을 다하는 자는 가슴에 품는다.
조범현 감독은 "KIA 선수단에 이대진은 그런 존재다.
이대진이 마운드에서 어떤 활약을 할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러나 존재만으로도 선수단 전체에 든든한 힘이 된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한마디 더 "물론 실력도 충분하다."
2009년 시즌 중 99승의 문턱에서 네번째 도전 끝에 통산 100번째 승리를 얻었다
2009년 코리안 시리즈 1차전을 앞두고 후배들에게 전할 말이 있냐는 질문에 그는 말했다
"우리는 타이거즈다"
"위축되지 마라. 9번 위업을 이룩한 선배들의 얼굴에 먹칠하지 마라" (KIA 조범현 감독)
대한민국 야구사에 있어서 해태 타이거즈가 이룩해 놓은 위업은 절대 과소평가될 수 없는 부분으로 다가온다
DdooSiKkoongYa
'공부방 > 아름다운 사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평생의 반쪽, 당신 (0) | 2010.02.26 |
---|---|
한국의 슈바이처 故 장기려 박사 (0) | 2010.02.12 |
괴팍한 할망구 (0) | 2009.06.14 |
우장춘 박사 (2) | 2009.02.24 |
["소수자 곁에 서라"…재판장의 가슴뭉클한 훈계] (0) | 2009.02.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