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서울의 한 가정집 안방
아버지가 신형 녹음기를 새로 사 오신 기념으로 시험차 온 가족이 둘러앉아 녹음기를 켜 놓고 '이효연 재롱잔치'를 마련합니다.
4살짜리 꼬마는 어른들의 '잘한다', '최고다'의 추임새에 마냥 들떠서 비록 혀짧은 소리지만 아는 노래들을 모두 불러제낍니다. 동요에서 트로트까지….
'띤구(친구)여 띤구여 어디에 있느냐 또?(소식)을 떤해다오(전해다오)'
이 노래는 이용복의 '친구'라는 곡으로, 마침 가사도우미 언니가 아이를 늘 등에 업고 다니며 흥얼대던 곡이라 아이는 제법 표정연기까지 해가며 자신있게 이 노래를 소화해냅니다.
1999년 CBS 3층 FM 주조정실
26년 전 이용복의 '친구'를 거침없이 불러제끼던 그 꼬마는 어느덧 훌쩍 커버려 올드팝 프로그램 <저녁스케치 939>의 DJ로서 마이크 앞에 앉게 되었습니다.
이 DJ는 다른 곡 소개 때와는 달리 안드레아 보첼리, 호세 펠리치아노 등 앞을 보지 못하는 가수들의 노래를 소개할 때면 반드시 다음과 같은 멘트를 빼놓지 않았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는 가수들은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더 깊이 더 많이 바라볼 겁니다. 그래서 이들이 부르는 노래는 우리의 귀에 전해지기에 앞서 가슴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이 세상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만이 전부는 아닐테니까 말이죠."
물론 이용복씨가 부른 번안가요 등을 소개하면서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2004년 2월의 어느날 CBS 3층 대기실 ('행복을 찾습니다' 방송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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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 이용복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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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효연 |
오늘 '행복을 찾습니다' 행복초대석 초대손님은 가수 이용복씨입니다. 어릴적 그의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재롱을 부렸던 꼬마가 이번에는 방송 진행자로서 가수 이용복씨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DJ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그의 노래만을 소개하던 것과는 또 다른 만남입니다. 방송 시작 전 명함 한 장을 챙겨들고 대기실로 향하면서 '점자 명함'을 만들어두지 못한 사실에 미안함을 가져봅니다.
"안녕하세요? 이용복 선생님. 전 프로그램 진행을 맡은 MC 이효연입니다. 오늘 방송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이용복씨는 몇 마디 제 인삿말을 듣고 나서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혹시 몇 년 전 '저녁스케치 939'를 진행했던 그 분 아니세요? 이…아무개라는…."
"어머나!!! 제 목소리를 기억하시나요?"
아! 그는 수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당시 음악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제 목소리를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뛸 듯이 기쁘고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느껴졌습니다. 무엇보다 가슴 뭉클한 것은 이용복씨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이름 석자가 아닌 제 목소리란 사실이었습니다. 시력이 약한 분들은 대신 청각이 상대적으로 많이 발달한다고 합니다. 이용복씨도 아마 그런 이유로 제 목소리를 기억하실 수 있었을 겁니다.
32년 전 4살 꼬마의 애창곡이었던 '친구'는 이용복씨의 기타연주가 곁들여진 라이브 곡으로 방송 전파를 타고 흘러나갑니다. 바로 옆에서 라이브로 그 노래를 듣는 MC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습니다.
가수의 노래를 귀가 아닌 '마음'으로 들었던 DJ, 그리고 이름 석자가 아닌 '목소리'로 DJ를 기억하는 가수의 만남은 그날 그렇게 행복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마음으로 들은 목소리'를 기억해주신 가수 이용복씨와의 만남은 '세상에서 뜻깊고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값진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날의 만남은 설령 제가 4천만이 알아주는 '유명 방송인'이 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그에는 견줄 수 없는 깊은 감동과 기쁨으로 제 가슴 한켠에 오래 자리할 것 같습니다.
어린 시절 - 이용복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 마음 아름다운 시절은 꽃잎처럼 흩어져 다시 올수없지만 잊을수는 없어라 꿈이었다고 가버렸다고 안개속이라해도 워우워우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눈사람 처럼 커지고 싶던 그 마음 내마음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에 눈사람처럼 커지고 싶던 그마음 내마음 꿈을 짓던 시절은 눈물 겹게 사라져 어느샌가 멀지만 찾아갈 수 있겠지 비가 온다고 바람 분다고 밤이 온다고 해도 워우워우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시절에 눈사람 처럼 커지고 싶던 내마음
1970년 가을 통기타 하나 달랑 들고 가요계에 뛰어든 그는 이듬해 이탈리아 산 레모 가요제 입상곡을 번안한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원제 1943년 3월 4일)'란 노래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그뒤 "눈을 감으면 저 멀리서 다가오는 다정한 그림자…"로 시작되는 `그 얼굴 에 햇살을', 아직도 어린이들이 즐겨 부르는 `어린 시절', `줄리아', `달맞이꽃', ` 잊으라면 잊겠어요', `사랑의 모닥불', `마지막 편지', `안개 속의 여인아', `마음 은 짚시'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10년 가까이 정상급 가수로 활약했다.
기타리스트로서도 재능이 있어서 양희은의 데뷔 앨범 《아침 이슬》에서 12줄 기타를 맡기도 했으며, 1972년과 1973년 연속으로 MBC 10대 가수상을 받았다.
탁월한 음악성과 빼어난 기타 솜씨, 독특한 음색 등으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 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노래보다는 그를 `맹인가수'로 기억하고 있다. 그는 세 살 때 마루에서 마당으로 떨어져 왼쪽 눈을 잃고 7살 때 썰매를 타다가 오른쪽 눈마저 찔 려 완전히 시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는 장애를 부끄럽다고 여기지 않고 TV 토크쇼에 나와 72년 MBC 10대가수쇼 도중 일어난 서울 시민회관의 화재사건을 언급하며 "불이 난 것을 내가 맨 처 음 봤다"며 익살을 떨기도 했다.
80년대 들어 그가 갑자기 TV에서 모습을 비치지 않자 새로운 최고 권력자가 "기분 나쁘다"고 한 마디 했기 때문에 출연이 중단됐다는 소문도 한동안 떠돌았다. 실제로 장애인단체에서는 항의하는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에 대해 그는 "80년 컬러TV가 도입되면서 PD들이 내 출연을 기피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지만 소문의 진위는 확인할 수 없었고 나도 그때는 가수활동에 많이 매달리지 않았다"고 말했다.
"78년 마지막 음반 `아낙'을 낸 뒤로 매니저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그러다보니 무대보다는 뒤에서 음악작업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끼게 되더군요. 84년 강남녹음실을 차렸다가 공부를 더해야겠다 싶어 이듬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지요.
91년 귀국해 서울 답십리에 다시 녹음실을 개업했습니다." 그의 녹음실을 거쳐간 뮤지션들은 벗님들, 이광조, 김수철, 부활 등 정상급 스 타. 2001년 샤크라의 앨범 `헤이 유'를 끝으로 녹음실을 접은 뒤 경기도 양평에 비 행기를 개조한 카페를 운영하며 작업실에서 신보에 매달렸다.
"예전에 발표한 음반 20여 장은 모두 타의에 의해 선곡된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우리 내외가 정성들여 만들고 꾸민 노래여서 애착이 더욱 깊습니다. 노랫말에도 연 애시절 추억이나 부부싸움의 애환,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생각 등 생활에서 우러나 오는 감정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맨 마지막 노래 `다시 오마 여수항아'는 여수시민 의 특별한 부탁으로 불렀지요."
그가 25년만에 다시 음반을 낸 것은 식지 않은 음악적 열정 때문이지만 장애인 들의 요청도 작용했다.
젊은 장애인들에게 용기를 심어달라는 부탁을 그가 어떻게 쉽게 뿌리칠 수 있었겠는가.
[소년,천국에 가다 OST, 2005 ]
1943년 3월 4일 생 - 이용복
DdooSiKkoong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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