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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아름다운 사람

청각장애인 발명왕 '에디슨'

by 뚜시꿍야 2008. 7. 17.

 

에디슨의 초상화

 

 

 청각장애인 발명왕 '에디슨'

 

오하이오주() 밀란에서 태어났다.

특허수가 1,000종을 넘어 ‘발명왕’이라 불리고 있다. 제재소를 경영하던 아버지 새뮤엘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7세 때에 미시간주 포트휴런으로 이사를 가 그곳 국민학교에 들어갔으나 겨우 3개월 만에 퇴학을 당해 교육은 주로 어머니한테서 받았다.

집안이 가난하였기 때문에 12세 때에 철도
의 신문팔이·과자팔이를 하면서도 시간을 절약하기 위하여 화물차 안으로 실험실을 옮겨 실험에 열중하였다. 신문팔이를 하던 어느 해 기차 실험실 안에서 화재를 일으켜 차장에게 얻어맞은 것이 귀에 청각장애를 일으키게 되었고, 그후부터는 사람들과의 교제도 끊고 연구에만 몰두하기 시작하였다.

 

15세 때 역장집 아이의 생명을 구해준 답례로 전신술()을 배우게 되어 1869년까지 미국·캐나다의 여러 곳에서 전신수로서 일하였다. 그 무렵 보스턴에서 패러데이의 《전기학의 실험적 연구》라는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았다.

그 책의 설명이 복잡한 수식()을 쓰고 있지 않은 데에 많은 흥미를 느꼈으며, 그 책에 나오는 실험을 연구하다가 1868년에 전기 투표기록기()를 발명하여 최초의 특허를 받았다.

이어서 다음해에는 주식상장
표시기() 등을 발명하였고 그 발명으로 얻은 자금을 기반으로 뉴저지주의 뉴어크에 공장을 세웠다. 그는 1876년에 멘로파크로, 1887년에는 웨스트오렌지로 연구소를 옮겼다.

 

이들 실험소에서 1871년에 인자전신기(), 1872년에 이중전신기, 1876년에 탄소전화기, 1877년에 축음기, 1879년에 백열전등, 1891년에 영화촬영기·영사기, 1891~1900년에 자기선광법(), 1900~1910년에 에디슨 축전기 등을 계속 발명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미국이 참전하게 되자, 한때 사업을 중단하고 해군 고문회의의 회장직을 맡아 군사과학상의 문제에 몰두하다가, 종전 후 다시 웨스트오렌지에 있는 연구소 공장으로 돌아와 고무 대용식물의 탐구 등에 주력,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연구를 계속하였다.

그의 일생을 통해서 볼 때 멘로파크에서 보낸 1876~1881년까지의 기간이 가장 창조력이 왕성하였던 시기이었다. 발명
기업은 번영하였고, 그가 말한 월가의 재벌들이 그의 늑허를 손에 넣고자 서로들 경쟁을 벌이던 시기였다. 전신·전화·백열등의 개량 등 수십 가지에 이르는 조직적인 발명이 동시에 이루어져 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이 전등의 발명
이었다. 이미 필라멘트의 재료로는 백금선이 좋은가 탄소선이 좋은가 하는 비교가 논의되고 있었는데, 1870년대에는 적당한 탄소선을 사용하는 것이 비교적 유망하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1878년부터 백열전구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한 그는 수은 배기 펌프의 개량과, 탄소 필라멘트의
채용으로 다음해인 1879년 10월 21일, 드디어 40시간 이상이나 계속해서 빛을 내는 전구를 만들어 내는 데 성공하였다. 필라멘트의 재료로는 대나무가 적합하다는 사실을 알고, 세계 여러 곳에 있는 대나무 산지까지 사람을 보내어 재료를 모아들였다. 일본 교토[] 부근에서 나는 대가 가장 좋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로부터 약 10년 동안은 이 대를 사용하였다.

 

그는 다시 전구를 보급하기 위하여 소켓·스윗치·안전 퓨즈·적산전력계()·배전방식 등을 고안하고, 효율이 높은 발전기와 배전반()의 설계 등, 전등의 부대설비에서 배전·충전·발전에 이르기까지의 전 기기체계()를 창조해 냈다.

 

1882년에는 세계 최초의 중앙발전소와 에디슨 전등회사가 창립되었다. 그리고 1883년에 그가 전구실험 중에 발견한 ‘에디슨 효과’는 20세기에 들어와 열전자 현상으로서 연구되고, 진공관에 응용되어 그후의 전자공업 발달의 바탕이 되었다.

그의 회사는 전구의 특허
권을 둘러싼 소송으로 많은 경제적인 손실을 보고 그 결과 그는 회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전등을 발명하였으나 전혀 이익을 보지 못했다”라고 한 말에는 월가, 즉 독점자본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된 그의 비통한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대학의 강의를 경멸하였다. 보통 교육에 대해서도 “현재의 시스템은, 두뇌를 하나의 틀에 맞추어 가고 있다. 독창적인 사고를 길러내지는 못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만들어지고 있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다”라고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천재란 99%가 땀이며, 나머지 1%가 영감이다”라는 말은, 일생을 통한 그의 유명한 모토였다. 이것은 만년의 술회(), “나는 발명을 계속하기 위한 돈을 얻기 위하여 언제나 발명을 한다”는 말과 더불어 끊임없이 연구와 창조를 계속한 끈질긴 그의 발명가 정신을 단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그가 태어난 밀란의 생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미시간주 디어본으로 옮겨진 멘로파크의 연구소
와 웨스트오렌지의 연구소는 각각 박물관으로 남아 있다.  ⓒ 두산백과사전

 

 

 

살아생전 1000여종이 넘는 발명특허를 출원한 에디슨.
그러나 그 많은 발명에도 불구하고 에디슨은 단 한번도 노벨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에디슨이 노벨상을 수상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한가지!  지나칠 정도의 경쟁심이었다고 한다.
동시대를 살아간 유명한 과학자 테슬라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강박관념과 경쟁의식은 유명한 일화로 남아있다.

그러나 에디슨의 지나친 경쟁의식과 편벽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에디슨은 여전히 최고의 발명왕으로 남아있다.

  

1876년에는 멜론 파아크에서 자기의 연구소를 만들어 참을성 있게 꼼꼼히 연구를 계속하면서 그는 '천재라는 것은 98%의 땀과 2%의 영감' 이라는 명언을 남겼는데, 이 말에서 우리는 에디슨이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자신의 핸디캡을 오히려 깊이 몰두할 수 있는 연구심으로 바꾼 피나는 노력가였음을 알 수 있다

 

 

    DdooSiKkoong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