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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아름다운 사람

가슴에 '工' 새겼던 아이…류근철 박사, 국내 최고액 기부

by 뚜시꿍야 2008. 8. 18.

 

가슴에 '工' 새겼던 아이…류근철 박사, 국내 최고액 기부
"KAIST는 한국의 MIT, 과학 발전이 선진국으로 가는 지름길"

 ⓒ 2008 HelloDD.com
그는 어렸을 적부터 가슴에 공업의 '공'자를 새기고 다녔다. 어릴 때부터 공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그는 선생님께 문제아였다. 그러나 혼내기만 하던 선생님도 결국 어린 학생에게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부터 예견돼 있었나 봐요. 우리나라 공업대학의 최고 명문인 KAIST와 이렇게 좋은 관계를 맺게 될 줄 말입니다. 허허허."

우리나라 한의학계의 원로이자 대한민국 1호 한의학 박사인 류근철 박사가 578억원 상당의 부동산(빌딩, 아파트, 임야)과 소장 골동품 등을 KAIST(한국과학기술원·총장 서남표)에 기부했다. 류 박사의 이번 기부액은 국내 기부 사상 최고액이자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KAIST에 기부함으로써 새로운 기부문화를 창조한 것으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와 관련해 14일 류근철 박사, 서남표 KAIST 총장을 비롯한 주요 보직자와 KAIST 발전재단 관계자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금약정식이 학내 대강당 세미나실에서 열렸다. 그가 식장에 등장하는 순간, 우뢰와 같은 박수와 함성이 터져나왔다. 식장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기립해 그를 맞이했다.

▲류근철 박사
ⓒ2008 HelloDD.com
류 박사는 성대한 환영식에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지난번 KAIST를 방문했을 때 서남표 총장님의 세계 최고의 대학을 향한 비전과 교직원, 학생들의 열정에 매료됐다"며 "특히 캠퍼스 야외에서 학생을 보기 힘들 정도로 면학에 열중해 있는 KAIST 학생들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바로 여기에 있구나 하는 확신을 가졌다"며 기부 배경을 밝혔다.

1926년 충청남도 천안에서 태어난 류 박사는 세계 최초(대한민국 1호) 한의학 박사로 현재 모스크바 국립공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3년 경희대학교 의료원의 부원장으로 재직시 '동서의학중풍센터'에서 환자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혼신들 다해 치료에 전념하기로 유명했다.

이후 그는 한의학과 공학을 연결하는 연구를 계속해 한의학자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 국립공대에서 의공학 박사학위를 받고 공학과 인연을 맺었다. 류 박사는 재직하면서도 의료 시설이 부족한 지방을 돌면서 무료 진료 활동을 계속했다.

특히 그는 자신의 모교인 충남 천안 천동초등학교에 1억 5000만원을 들여 학생들과 주민이 함께 이용할 수 있는 다목적 체육관과 게이트볼장 등을 건립, 기증한 바 있어 훈훈한 감동을 전하기도 했다.

류 박사는 "이 많은 돈을 지불하기까지 아내의 도움이 컸다"면서 몸이 좋지 않아 자리에 참석하지 못한 자신의 아내에게 모든 공을 돌렸다. 그는 "우리나라가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의 발전이 필수이고 그 역할을 선도적으로 이끌어 갈 수 있는 곳이 KAIST"라면서 "KAIST가 세계 최고의 대학이 되어 우리나라와 인류에 공헌하는데 일조를 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선진국에 비해 우리나라는 기부의식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며 "이번의 기부가 한국의 기부문화 발전에도 도움이 됐으면 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한편 KAIST는 류 박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앞으로 행정중심복합도시 내에 건립예정인 KAIST 세종캠퍼스를 'KAIST 류근철 캠퍼스'로 명명하고, 동상과 기념관을 건립키고 하고 KAIST 발전재단 명예 이사장으로 추대할 방침이다.

서남표 총장은 "류 박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이번 기부금을 적절히 활용하겠다"면서 "아무 관계없는 학교에 기부한 것은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기부문화의 모범을 보여주신 것"이라며 "앞으로 학교에서 진행되고 있는 많은 프로젝트를 차질없이 준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KAIST는 류 박사의 기부 소식에 전국 각지에서 격려 전화가 빗발치고 있다며 류 박사로부터 한방 치료를 받았던 경기도 과천에 안중만씨가 발전기금으로 100만원을 기부하겠다는 의사를 밝혀오기도 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류근철 박사와의 일문일답

기자(이하 기) : 박사님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KAIST에 기부를 하기로 결심하시게 된 구체적인 계기가 무엇인가?

류근철 박사(이하 류) : 평소에 기부를 해야 겠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 대학에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때 평소 친분이 있었던 나소원 원자력의학·환경보호포럼 총재가 KAIST를 추천했었다. 들어보니 나 총재의 외손녀로 KAIST 생명과학과 2년차 박사과정중인 정현정씨가 외할머니를 통해 "한국의 MIT와 같은 KAIST에 발전기금을 기부해달라"고 설득했다고 들었다.

그일을 계기로 지난 6월 KAIST를 방문했었다. 캠퍼스에 학생들이 별로 없어서 의아했었다. 그런데 그 이유가 학생들이 전부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후 서남표 총장이 말한 KAIST의 비전을 듣고 기부를 결심하게 됐다.

기 : 578억의 기부금이 앞으로 어떻게 활용됐으면 하는가?

류 : 서울시 종로구 평동에 있는 5층 빌딩(528억원 상당)의 경우 향후 세종도시에 활용될 것으로 합의봤다. 또한 경북 영양군의 임야 33만여㎡(40억원 상당)의 땅은 과학자들을 예우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달라는 나의 부탁을 받아 서남표 총장이 학생들의 연수시설과 휴앙소, 과학자들의 묘역으로 다듬어질 계획이다. 또한 종로구 내서동에 있는 아파트는 KAIST의 게스트 하우스로 쓰일 예정인데, 세계 속의 KAIST가 60평으로는 조금 모자르다 싶어 어떻게 해서든 40평을 채워 100평으로 만들 계획이다.

기 : 새로운 기부문화에 획을 그었다. 앞으로 기부문화가 어떻게 발전됐으면 하는가?

류 : 과학자가 빛날 수 있는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연구환경이 뒷받침돼야 한다. 연구할 수 있도록 국가와 국민들이 많은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 국가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뜻 깊은 생각을 해줬으면 좋겠다.

기 : 앞으로 꿈이 있다면 무엇인가?

류 : 연구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지금 현재로서는 우주비행사의 급강하 급강상에서 오는 질병치료 연구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소원이다. 많은 연구를 해서 KAIST의 학생들과 교수들에게 도움이 되고, 또 나아가서는 국가 발전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류근철 박사와 서남표 총장이 약정서에 서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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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명한 약정서를 함께 들고 있는 류근철 박사와 서남표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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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남표 총장이 류근철 박사에게 감사패를 수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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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결심에 큰 역할을 한 정현정 학생을 소개하고 있는 류근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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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IST 교직원들에게 감사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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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단체 사진 한 컷
ⓒ2008 HelloDD.com

<대덕넷 임은희 기자> redant645@hellodd.com

 

“578억원은 내가 잠시 관리했던 돈일 뿐”

 

[중앙일보 한은화.박종근] 15일 오후 서울 광화문의 한 주상복합 아파트. 578억원을 KAIST에 쾌척한 류근철(82) 모스크바국립공대 종신교수가 연구실 겸 숙소로 쓰는 곳이다. 류 박사는 서울 잠실의 부인 명의 아파트 한 채를 제외한 모든 재산을 “과학기술 발전과 인재 양성에 써 달라”며 KAIST에 기부했다. 이 아파트도 기부 대상에 포함됐다.

류 박사의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야구 배트, 철판, 나무 판자 등이 현관부터 쌓여 있었다. 실내는 말 그대로 '잡동사니'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류 박사는 “주워 온 것인데 원래 잘 버리지를 못해. 나는 '꼼생이'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심심할 때마다 이런 것들로 뚝딱뚝딱 만들고 싶은 걸 만들어 쓰기 때문에 나한테는 모두 필요한 물건”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말처럼 거실 벽에는 버려진 스키로 만든 책꽂이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책상은 주워 온 쇠판에 나무나 쇠막대를 대어 만들었다. 쇠 절단기를 흔들거리는 책상의 지지대로 삼았고, 남이 쓰다 버린 털조끼를 방석으로 사용했다.

아파트 화장실엔 그가 만들어 길이 조절이 가능한 휴지걸이가 걸려있다. 휴지걸이에는 기름을 넣으면 주유소에서 나눠 주는 갑휴지가 담겨 있었다. 류 박사는 장롱이나 침대를 제외한 살림살이 대부분을 직접 만들었다고 했다. 주워 온 잡동사니가 류 박사의 보물인 셈이다. 류 박사는 1972년 최초로 침술로 제왕절개 수술 마취에 성공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돈을 벌었다. 번 돈으로 서대문구의 빌딩을 샀는데 수요자가 많아 장소를 옮기면서 재산이 불어났다. 최근에는 건물 주변이 재개발되면서 자산 가치가 급등했다.

수백억대 부자인 류 박사는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밴 사람이었다. 실내에는 에어컨은 물론 그 흔한 선풍기조차 없었다. 신발장에는 20년째 신어 뒤축이 다 찢어진 갈색 구두가 놓여 있었다. 류 박사는 “이발을 하러 가면 면도 값 8000원이 아까워 면도는 안 하고 온다”며 호탕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고 류 박사가 '스크루지'처럼 짜기만 한 삶을 산 건 아니었다. 여든이 넘는 나이에도 그는 여전히 수상스키와 승마, 골프 등을 즐긴다. 류 박사는 “구멍 난 내의를 입고 남대문시장에서 산 만원에 네 개짜리 넥타이를 매기도 하지만 필요할 때는 디자이너를 불러 옷을 맞추기도 한다”고 했다.

그는 하루에 한 끼를 거나하게 먹는다. 위장도 신축 운동을 많이 해야 건강하다는 것이다. 커피도 그냥 마시지 않는다. 원두커피에 인삼차 두 봉지와 우유를 넣어 마신다.

류 박사는 “돈은 쓸 데는 써야 한다”고 했고 “삶은 내 스타일과 내 개성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전자침술기' '추간판 및 관절 교정용 운동기구' 등을 개발해 국내외 특허를 여러 개 취득하고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96년 모스크바국립공대 종신교수가 된 류 박사. 그는 개성 만점의 멋진 여든 인생을 살고 있었다.

글=한은화 기자 ,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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