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계령 위령비
현재의 한계령 도로는 1968년 김재규가 사단장으로 있던 1102 야전 공병단에서 착공하여 1971년 완공하였다.
한계령 도로의 완공을 기념하여 한계령 108계단 위에 있는 설악루라는 정자 옆에 공덕비를 만들었으며 “설악루”라는 현판은
김재규 당시 사단장이 직접 썼다고 하며, 현재까지 전해온다.
이러한 한계령이 더욱 유명해진 것은 아마 1984년 시인과 촌장 이 처음 불렀고, 양희은씨가 1985년에 다시 부른 노래
“한계령” (작사: 정덕수) 때문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님이 작사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다
계간 <시인세계>에서 2004년 봄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글 짓는 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중 5위에 뽑힐 정도로 가사가
시적이며 서정적인 선율을 지니고 있는 노래 “한계령”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한계령”을 부른 양희은씨는 이 노래를 부른 지 10년이 지나서야 한계령에 처음 와 봤다고 한다. 이 얘기를 들은
주위 사람들이 양희은씨에게 ‘사기’라고 했단다. 그럴 때마다 양희은씨는 ‘그럼 연극배우들은 암환자 연기할 때 암 걸려보고
하냐’며 대꾸하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
정덕수님의 '한계령'은 연작시로서 10편에 이른다 하덕규님은 장시(長詩)를 자신만의 음률로 만들어 곡을 붙였으나
정덕수님이 원시(原詩)의 훼손이 심함을 정정해 줄 것을 요구하자 하덕규님이 공식석상에서 무단사용을 사과했다고도 하고,
이에 정덕수님은 하덕규님의 덕분으로 자신의 시가가 유명해졌음을 감사했다는 말도 있다
반면 손숙과의 라디오 인터뷰에서 하덕규님은 자신의 자작시가 맞다고 했다는 말도 있는데 진위여부는 모르겠다
다만 하덕규님의 시집, 1989년 출간,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등을 찾아봐도 '한계령'은 게재되어 있지 않다
반면 정덕수님의 '한계령 1편'이 세상에 선을 보인게 1981년이니 시기적으로 볼 때 정덕수님의 시가 맞다는 생각이다
문헌상 가장 최초로 등장하는 한계령에 관한 지명은 세종실록지리지(1454년)의 “소등라령(所等羅嶺)”이다. 소등라령을 국역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바드라재’로 번역하였다. 속초여고 주상훈 교사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 고개의 원래 이름은 '바드라'였다. 이 바드라를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이두식으로 소등라(所等羅)라고 표기하였다가,
그 후 조선시대 읍지류에서 발음상 편한 소동라(所冬羅)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조선시대 후기 문헌인 택리지, 대동여지도,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는 전부 한계령을 ‘오색령’으로 부르고 있다.
현재와 같이 한계령으로 명명된 것은 1968년 공병부대가 한계령 도로공사를 인제쪽에서부터 시작하다 보니 인제군 한계리의
이름을 따 한계령이라 하였다.
한계령 - 양희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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