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들이 하는 말 중 "저 애는 싹이 노래.."하는 말이 있다
커서 어떤 모습이 될런지 눈에 훤하다는 말일게다.
그런 아이들 중에서 크게 성공하거나 후대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이
적잖다.
사람들은 그래서 크게 성공한 사람의 어린 시절을 얘기할 때엔 과장해
서 얘기하는 경우도 흔치 않을 것이다.
여기 그런 사람 중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樂聖 베토벤'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있다
베토벤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본의 궁정악단 단원과 테너가수
였다. 그래서인지 어려서부터 음악적 재질을 보이자 아버지는 베토벤
을 모차르트와 같은 신동으로 만들어 돈벌이를 할 요량으로 혹독한 음
악 훈련을 시켰다. 이에 대한 반항심으로 베토벤은 고집도 세고, 비타협적이며, 이기적인
사고를 갖게됐다.
어려서 항상 골목대장 노릇을 했으며, 주인집 닭의 알을 슬쩍하기도 하고, 길가의 닭들을 몰래 잡아 먹기도 하였다.
집주인의 아들 고드프리트 피셔는 "베토벤이 같은 나이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때면
평화란 결코 없었다"라고 회고할 정도다.
초등학교 동급생은 "베토벤은 몹시 불결한데다 수업을 빼먹기 일쑤였다"라고 기억한다.
20대 후반 부터 죽을 때까지는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많은 이사를 다녀야했다
이유인 즉은 성격이 과격하고 신경질이 보통이 아닌데다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한밤중에도 피아노를 마구 두들겨대는 등등으로 이웃과 늘 사이가 좋지 않았기때문이다.
또한 큰아버지로서 조카에게 용돈을 주는데 매우 인색했으며, 설령 용돈을 준 경우라면 반드시 용도와 함께 영수증을 받아오게 하였다. 결국 조카가 큰아버지를 좋아할 리가 없었을 것이다.
30이 넘어서는 귓병과 위장병이 악화되어 요양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지만 그 곳에서도 받아주는 여관이나 하숙집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뫼드링크에 있는 한 집만이 언제나 베토벤을 환영했는데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베토벤은 악상이 떠오르면 종이가 없을 경우 빈지문에 오선지를 긋고 악보를 적는 습관이 있었는데, 집주인은 그가 떠나고 나면 악보가 적힌 빈지문을 떼어내 수집가에게 비싼 값으로 팔았다고 한다.
베토벤에겐 남동생 둘이 있었다
그 중 막내 요한은 약제사를 하면서 투기에 능해 많은 재산과
토지를 소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베토벤은 그런 동생 요한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돈이 궁색해진 베토벤이 요한에게 손을 벌리자 요한
은 형 베토벤의 곤경을 외면하는 편지를 보내며 말미에 '토지
소유자 동생 요한' 이라고 썼다.
그러자 베토벤은 "너의 돈은 필요없다. 너의 설교도 필요없
다. 두뇌 소유자 루드비히 판 베토벤" 이라는 답장을 보냈
다고 한다.
이렇듯 세상과 등지고 살아가는 베토벤은 말년에 사교계를
등지고 깊은 산중에 들어가 생활하다 느닷없이 나타나곤 했
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남루한 옷차림을 보고 경찰이 검문을 하
자 "나는 베토벤이요"하고 아무리 설명해도 알아보지 못하던
끝에 경찰국장이 그를 알아보고 사죄했다고 한다.
그러자 베토벤은 "베토벤도 못 알아보는 녀석들을 도둑은 어
카핑 베토벤 (Copying Beethoven, 2006) 떻게 알아보라고 거기다 세워놓았소?" 했다 한다.
동시대에 살던 대문호 괴테는 어느 날 베토벤을 찾아가 프라 타 공원을 산책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은 약속이나 한 듯 두 사람을 향해 머리를 숙 이고 경의를 표했다.
이에 모자를 벗고 일일이 답례하는 것은 괴테뿐, 베토벤은 무슨 상념엔가 사로잡혀 먼 하늘만 응시했다.
이에 자주 모자를 벗어가며 답례하는 것이 귀찮아진 괴테가 "선량한 시민들이란 따분한 존재들이구려. 덮어놓고 자꾸 절만 하니 말이오" 그러자 베토벤은 "저, 괴테 선생,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섭섭해하지 마시오. 그들은 전부 저에게 인사하는 거랍니다"
만약에 이런 사람에 이웃에 함께 산다면 꽤나 피곤할 듯 싶다.
베토벤은 독일이 낳은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고전파 음악의 완성자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음악가였던 만큼, 그는 어려서부터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열 네 살 때 궁정 예배당의 오르간 연주자로 임명되었다. 그 후 열 일곱 살에 빈에서 온 발트시타인 백작의 추천으로 빈에 가서 하이든으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그는 대단한 노력가였고, 겉으로만 아름답고 화려한 것은 싫어했으며 마음속의 감동을 중시하였다. 그러다 스물 여섯 살 때 병을 앓아 마침내 귀가 들리지 않게 되었으며, 서른두살 때는 유서를 쓰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그 괴로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갔기 때문에 그의 음악은 귀를 즐겁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대예술로 전해져 오는 것이다. 그가 청각장애인이 되고 난 후 작곡한 불후의 명곡 교향곡 9번 '합창'을 들어보라! 그것은 귀로 듣는 음악이 아니라 가슴으로 듣는 음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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