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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무실에서의 생전 모습
향년 만 87세의 천주교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16일 오후 6시12분 선종했다(서거를 뜻하는 천주교 용어)
김 추기경은 건강 악화로 7개월간 입원치료를 받아왔다.
수차례 고비를 넘긴 김 추기경은 최근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로 기력이 악화됐고 끝내 "고맙다"란 말씀을 남기시고 이날 선종했다.
대한민국의 격동기를 몸소 버텨내시며 살아있는 역사의 증인으로서 또한 억압받던 국민의 대변인 겸 보호자로서 당신에게 주어진
종교적 신앙인의 모습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살아온 국민들에게 미래를 책임질 젊은이들에게 진실된 본을 보여주신 분으로
비록 육신은 떠나지만 그 영혼과 가르침은 길이 전해질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추기경 |
추기경(樞機卿, 라틴어: Cardinalis, Cardinal)
가톨릭교회에서 교황 다음의 권위와 명예를 누리는 고위 성직자를 가리키는 말
정식 칭호는 거룩한 로마 교회의 추기경(De Sanctae Romanae Ecclesiae cadinalibus).
종종 교회의 황태자로 비유되어 전하(殿下, Eminentia)라는 존칭으로 불린다.
추기경을 뜻하는 라틴어 cardinalis는 ‘주요인사’ 내지는 ‘우두머리’를 뜻하는 라틴어 cardo에서 유래한 말로
9세기 초에 처음 등장 추기경(樞機卿)에서 추기(樞機)라는 말은 중추(中樞)가 되는 기관(機關)을, 경(卿)은 높은 벼슬을 말한다
교황 다음가는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이며 국가원수에 준하는 국빈 대우를 받는 위치에 있는 분이다.
김수환 추기경의 생애 |
김 추기경은 1922년 음력 윤5월 8일(양력 7월 2일) 대구 남산동 독실한 구교우 집안에서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8년 무진박해 때 충남 연산에서 체포돼 서울에서 순교했다.
천주교로 인해 몰락한 집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 김영석 요셉은 옹기장수로 전전하면서 가난하게 살았다.
김 추기경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선종하자 모친인 서중하 마르티나는 옹기와 포목행상을 하며 엄격하게 아이들을 키웠다.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온 김 추기경은 5년제 소신학교(小神學敎)인 동성상업학교(지금의 동성고등
학교) 을조(乙組)에 입학했다가 '황국 신민으로서 그 소감을 쓰라'는 시험 문제에 "나는 황국 신민이 아님. 따라서 소감이 없음"
이라고 썼다가 교장실에 불려가 크게 야단을 맞았다. 그 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라는 대구대교구장을 명령을 받고 1941년
4월 도쿄 조치(上智)대학 유학길에 오른다. 2차 세계대전으로 잠시 휴학했던 김 추기경은 해방 이후인 1947년 9월 혜화동
성신대학(지금의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에 복학해 마치고 1951년 9월 15일 대구 계산동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됐다.
1966년 4월 부산교구에서 분리, 새 교구로 설립된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됐다. 1968년 5월29일 대주교 승품된 그는
제12대 서울대교구장에 올랐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969년 4월28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추기경 서임됐다. 그의 나이
47세였다. 당시 주교였던 김 추기경은 1968년 2월 9일 한국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사회적 발언에 나선다. 노동자들의 인간
존엄성을 되찾기 위해 나선 것이다.
가톨릭노동청년회(JOC; Jeunesse Ouvriere Chretienne)의 총재주교였던 그는 합법적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를
불법 해고한 ‘강화 심도직물 사건’에 맞서 ‘사회 정의와 노동자 권익 옹호를 위한 주교단 공동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 발표 이후 정부가 사태 수습에 나서 6일 후 해고자들이 전원 복직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됐지만 이후로도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생존권을 요구하는 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김 추기경은 그들을 큰 품으로 끌어안았다.
김 추기경과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큰 버팀목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 추기경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파생된 한국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인간의 기본권과 사회 정의가 지켜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을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김수환 추기경은 선교사 없이 신앙이 전파된 한국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이 세계 천주교회 속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전세계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을 처음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 함께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 기념과
103위 시성식을 여의도 광장에서 개최했다.
순교의 피로 전해져 내려온 한국 교회의 신앙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9년에도 한 번 더 방한해 제44차 세계 성체대회를 주례했다.
세계 성체대회를 계기로 1988년에 시작한 ‘한마음한몸운동’은 성체성사의 깊은 뜻을 삶으로 실천하자는 운동으로
지금까지 많은 결실을 맺었다.
김 추기경은 북한 교회와 동포를 항상 기억하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서울대교구의 관할 구역이 휴전선을 넘어서 황해도까지 이어진다는 사실과도 관련이 있었다
미사 마침예식에서 주교는 오른손으로 세 번 십자표시를 하면서 신자들에게 강복하는데
김 추기경은 언제나 그 마지막 세 번째 십자표시를 마음에 품고 있는 북녘 형제들을 생각하면서 그었다고 한다.
통일에 대비하고 앞으로의 북한 선교를 위한 실질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1995년 ‘민족화해위원회’를 설립하게 된다.
같은 해 3월 7일 명동대성당에서 시작된 ‘민족화해미사’는 지금도 매주 화요일 오후 7시에 봉헌되고 있다.
“이 세상 누구도 존중받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제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주목한 이유입니다. 그들을 위한
‘우선적 사랑’에서 더 나아가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사랑’으로 가야 합니다.”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편에 선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기까지 한 1974년 민청학련 사건, 1978년 동일
방직노조 사건 등 김 추기경은 성탄·사순 메시지나 강연, 시국담화문 등을 통해 한국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짚어내는 일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70-80년대를 지나는 동안 김 추기경은 우리사회 민주화 운동의 버팀목이자 잣대였다.
1987년 6·10 민주항쟁 때도 명동성당 공권력 투입이라는 일촉즉발의 위기를 그런 믿음 하나로 막았다.
“성당 안으로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우리를 다 넘어뜨리고 난 후에야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
김수환 추기경이 종교를 넘어 이 땅의 버팀목으로 여겨지는 것은 그가 더 낮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한 없이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CBS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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