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어머니는 뜨개질을 참으로 많이 하셨던 기억이 있다
대바늘이 아닌 여러가지 모양의 코바늘이라고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만들어진 옷들은 미국이나 일본으로 수출을 한다고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일종의 대리점같은 형태다
공장에서 어머니가 대량으로 실과 함께 그려진 디자인을 받아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할당량을 나누어준다
동네 친구들과 뛰놀다가도 어머니가 찾으시면 당장에 달려가야했다
동네 한바퀴를 다 돌며 적힌대로 보따리를 풀어주고 또 납기일이 가까워지면 일일이 찾아다니며 수거를 해왔다
벨도 전화기도 흔하지 않던 시절 집 대문을 두드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창호 엄마", 또는 "창호 아주머니"하고
그러다 창호 형이 뛰쳐 나오면서 앞으론 큰 소리로 내 이름 부르지말라며 한 대 쥐어박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냥 "아주머니"하고 부르면 될 것을 괜히 형이름을 들먹였다 싶기도하며 웃음이 난다
늘 생업에 바쁘신 어머니를 대신해 식사준비와 동생들의 간식까지 내가 해야 할 몫이였다
아마도 이 때부터 음식에 남다른 재미를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내가 해준 도너츠나, 빵 등을 동네 아주머니들이 맛있다고 하면 그게 그렇게 좋았다
자주 만들던 음식들에 나름의 비법을 만들어 가기도 했던 것 같다
아마도 70년대 중반까지 남들과는 조금 다른 그런 일상으로 자랐던 기억이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뜨개질하면 집안 곳곳에 날리던 실털들과 심부름하던 모습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그때까지만해도 대부분의 많은 어머니나 누나들은 추운 계절이 다가올 즈음이면 가족이나 애인을 생각하며 털실을 사다
장갑이며 목도리, 모자, 스웨터를 뜨는 모습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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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요즘 다시 뜨개질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젊은 남성들도 뜨개질에 빠져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어느 회사에서는 아프리카의 어린 아이들을 돕기 위한 모자뜨기 캠페인에 단체로 참가하느라 남자 직원들도 모두
뜨개질을 배웠다는 소식도 들린다
세이브더칠드런이 주관하는 아프리카 신생아 모자뜨기 캠페인에 참여하는 것이다
일교차가 심한 아프리카에서는 영양 부족으로 허약해진 아기들이 저체온증으로 사망하는 경우도 많은데 그곳 아이들에게
털실로 짠 모자를 보내는 운동에 한 기업체가 단체로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프리카하면 나는 덥기만 한 땅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곳에서도 어린 아이들은 추위에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과
작은 털모자 하나면 그 추위를 막아줄 수 있다는 사실이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남대문 시장에 가면 '뜨개질하는 남자' 란 상점이 있다
대학교 4학년 때 열차 사고로 왼쪽 다리를 30cm나 잘라낸 전직 우익수 출신이 병원비 마련을 위해 어머니 가게를 돕다가
우연히 처음 만든 가방이 팔리자 자신감을 얻은 이후부터 상호도 바꾸고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고 한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무릎담요를 덮고 앉아 뜨개질을 하는 모습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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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나도 뜨개질은 아니지만 스킬자수 재미에 빠졌다
딸 아이가 학교에서 실습용으로 하던 스킬자수가 학교일정이 바뀌면서 방학숙제가 되었다
바쁜(?) 딸 아이를 위해 잠시 스킬자수 놓는 법을 배워 틈틈이 하다보니 꽤 많이 놓았다
그걸 본 아이는 "아빠, 다시 풀어! 내가 할건데..."
이런 저런 변명에 궁시렁 거리면서 결국 절반 이상을 풀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아이가 스킬자수 숙제를 하지 않았고 방학 끝무렵이 되자 아이 몰래 다시 스킬자수를 놓았다
한 코 한 코 놓아가다보니 어느 덧 하나의 그림이 되어가는 모습이 참으로 재미있다
마치 퍼즐을 맞춰가는 기분이다
마무리는 아이가 한다고 했지만 그 마저도 내가 하게되지 않을까 싶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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